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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재, 'DJ 햇볕정책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김정일 사기에 당한 것...DJ 아시면 대성통곡, 사죄할 것' '전두환 지지자였던 가발 판매업자를 내가 DJ에 소개' '김경재 한광옥 한화갑 등 3학사 朴 집중견게 받아'

요즘 ‘사드 배치’ 문제와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햇볕정책’ 등을 놓고 사사건건 충돌하는 유력인사들이 있다.

바로 김경재 자유총연맹 총재와 국민의당 박지원 비상대책위원장이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모두 DJ의 측근인사들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세간에 두 사람은 상당히 가까운 사이였던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김경재 총재는 “잘 알지요. 그러나 가까운 사이는 무슨...”이라며 확실하게 선을 긋고 나섰다.

김 총재는 박지원 위원장과 “뉴욕의 브로드웨이 거리에서 만난 사이일 뿐 한국내에서는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

-박지원 위원장과는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가. 세간엔 두 사람이 무척 가까운 사이인 것으로 알려졌는데 ‘거리에서 만난 사이’일 뿐이라니 의외다.

 = 처음 박지원을 만났을 때가 80년대다. 그때 박지원은 전두환을 지지하고 다녔다. 전두환 방미 때 그는 환영 준비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또 전두환 동생 전경환하고 어울려 돌아다니다가 재미교포들로부터 계란 세례를 받기도 했었다. 당시 박지원의 32가 가발가게 옆 건물 8층에서 신문사를 운영하던 나는 그런 모습이 안타가워서 커피 한잔 하자고 그를 불러내서 "박 회장! 박정희 지지는 모르겠는데 왜 하필 전두환을 지지하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박지원은 "연좌제 때문에 너무 고생을 했다. 살아남으려면 집권당 쪽에 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연좌제로 인해 외롭게 고생했던 불우한 소년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더라. 박지원 부친은 전남 진도 남로당 책임자였다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었다.

그의 얘기를 들으니 그가 전두환을 지지했던 자초지종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마침 연좌제가 폐지됐다. 그래서 동갑내기이고. 같은 호남 출신인 그에게 DJ 지원을 요청했다.

당시 워싱턴에 머물고 있는 DJ는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워 사무실을 폐쇄하고 아파트로 옮길 정도여서 하루에도 몇 번씩 나에게 전화를 해오던 처지였다. 당시 DJ가 타고 다니던 차도 내가 월부로 구입해 드릴 정도였다. 그런데 박지원은 가발과 장신구 판매업으로 상당한 돈을 모았다.

그래서 경제적 지원을 요청한 것이었다, 그때 내가 박지원에게 “DJ를 도와주면 당신에게 비례대표 한자리는 돌아가지 않겠느냐, 베팅을 하려면 전두환, 김영삼에게가 아니라 김대중에게 하라"고 말했다. 그렇게 설득해서 박지원을 워싱턴까지 끌고 가 DJ에게 소개 시켜준 사람이 바로 나다.

굳이 따지자면, 박지원과의 관계는 동갑내기에 같은 동향 출신이라는 것과 그에게 DJ를 소개 시켜준 게 전부다.    
 
- 김대중정부 당시 DJ 측근들 가운데 중간에 유독 ‘3학사’가 박지원의 견제를 많이 받았다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게 무슨 소리인가.

=(호탕하게 웃으며)박지원은 아무래도 일류만 사귀려고 들었다. 그러면서도 그런 사람들을 교묘하게 견제하는데 거의 천재적이었다. 동교동계의 3학사는 서울대 출신인 나와 한광옥, 한화갑 세 사람을 지칭하는 모양이다. 공교롭게도 이들 모두가 지금 박지원과 척을 지고 있다.

이들 뿐만 아니라 북한에 비판적이었던 측근들은 모두 밀려났다. DJ가 워싱턴에 머물 당시 미국에는 민주화운동 3대 파워세력이 있었다. DJ가 주도하던 인권문제연구소는 나와 대학동기인 이영작 박사와 유종근 박사가 돕고 있었고 나는 미주민통연합 의장 그리고 내가 독립신문 주필로 두 기관을 맡고 있어서 사실상 미주민주운동을 주도했다.

그래서 DJ는 일만 있으면 나를 찾았고 나는 그의 인권문제연구소도 신경을 써야 할 입장이었다. 그런데 이영작 교수도 나중에 박지원의 견제를 받은 것 같다. 특히 나 같은 경우는 막판에 DJ가 병석에 계실 때 1년 반 동안 면담조차 하지 못했다. 권노갑도 못했다.

박지원이 ‘인의 장막’을 쳤던 것이다. 그래도 DJ가 가실 때 서울시청 앞에 나갔더니 노무현패거리들이 진을 치고 있어서 동지들과 배타고 하의도 DJ생가까지 내려가서 문상객들을 맞이하면서 쓸쓸하게 그분을 보내 드렸다. DJ에게 어떤 이유로든 소외당한 ‘외로운 충신’이었다지만 끝까지 충신의 도리를 다하려 노력했다. 생가에서 바라보이던 바다는 참으로 처절하였다.
 
-박근혜 대통령의 ‘국군의 날’ 기념사를 통해 “언제든 대한민국의 자유로운 터전으로 오시기를 바란다”며 북한 군인과 주민들의 탈북을 권유했다. 박지원 위원장은 이와 관련, “북한 주민의 대량 탈출과 체제 붕괴는 늘 대비해야 할 컨틴전시 플랜(비상계획)이지만 그런 상황을 우리가 먼저 만들어서는 안 되고 만드는 것도 불가능하다”며 “대북 선전포고”라고 강력 반발했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보는가.

 =탈북의 바람은 이제 더 이상 박을 수 없고, 북한정권의 종말이 임박했다. ‘코리안 엑소더스’가 벌어질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대한민국 대화합의 장터’가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것을 '대북선전포고'라고 하는 박지원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북핵 보다도 더 위험한 것은 친북ㆍ종북세력에 의한 국론분열이다. 물론 통일을 위해선 좌파적 사고를 가진 사람도 일부 용납할 수는 있다. 그러나 국가의 정체성을 흔드는 것만큼은 절대로 안 된다.

특히 다른 사람은 다 이야기해도 김정일에게 현찰 4억 5000만 불을 쥐어준 박지원만큼은 최소한 침묵을 지켜야 한다. 국민에게 사죄해야 한다.

-4억5000만불을 김정일에게 현찰로 쥐어 주었다는 건 무슨 소리인가.

=햇볕정책의 일환으로 당시 ‘평화자전거’라는 이름으로 자전거 5000대를 먼저 북한에 보냈다. 그리고 1999년 11월6일부터 1주일간 DJ 특사로 평양을 방문해 그들이 사전에 약속한대로 쌀 1000톤, 옥수수 1000톤 등 지원물품을 확인(모니터링)하려고 했으나 북한측 방해로 모니터링을 하지 못했다. 당시 투숙했던 고려호텔 VIP룸에서 도청장치를 확인했고, 또 2명의 여인이 짝을 지어 서빙한다고 들어온 것도 개운치 않았다. 그런데 이후에 평양을 방문한 뒤, 갑자기 친북노선으로 전향한 인물을 볼 때마다 무언가 북측에 약점을 잡힌 게 아닐까 우려한다,

아무튼 당시에 나는 그런 상황 등을 감안해 DJ에게 현금 지원은 위험하다고 말씀드렸다. 그런데도 박지원이 2000년도에 그 돈을 김정일 개인계좌에 넣어주었다. 핵무기 개발은 초기 기획단계에 큰돈이 들어간다. 1998년부터 기획을 했으니 2000년도쯤에 목돈이 들어갈 시점이고, 그 돈을 김정일 개인계좌에 넣어준 게 박지원이다. 그렇게 개발하여 2006년도에 첫 핵실험을 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박지원은 입 다물고 핵개발 시점에 4억5000만불의 현찰을 김정일에 쥐워 준 경위를 설명하고 국민 앞에 사죄해야 하는 것 아니냐. 그게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도리 아닌가?

-그렇다면 햇볕정책은 북한의 핵개발을 도운 정책이라는 것인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셈이다. 한마디로 김정일이 사기를 친 것이다. 나쁜 놈은 김정일이다. 보수진영 일각에서는 DJ가 북한의 핵개발을 돕기 위해 일부러 돈을 퍼주었다고 의심하지만 DJ는 북한이 이판사판 무력도발, 교류도 개방도 거부하는 고립, 생존을 위한 개방의 길 중 세 번째 길을 택할 수밖에 없을 거라 굳게 믿었다. 사실 DJ가 햇볕정책을 추진할 시기, 클린턴 행정부와는 한 팀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손발이 맞았다. 즉 햇볕정책은 DJ 혼자 국제질서에서 이탈, 무리하게 추진한 것이 아니라, 미국의 절대 지지, 중국, 러시아, 일본이 협조로 이뤄진, 그 당시의 국제적 흐름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일방적으로 퍼주면 북한 스스로 개방할 것이라는 햇볕정책은 실패했다.

이 상황에서 더 이상 햇볕정책지지 운운하는 것은 지각이 없는 무식한 자의 넋두리 이거나 아니면 김정은의 대변자일 뿐이다. 1998년도 파키스탄 브로커로부터 핵기술을 사왔다는 게 정설이므로, 2000년도에 김정일 해외비밀 계좌로 송금된 4억5000불은 분명히 핵무기 개발에 사용되었을 거다.

이런 상황을 DJ가 보시면 대성통곡을 하실 것이다. 자신 있게 말씀드리지만 김대중 대통령이 살아계셨으면, 사드 배치 찬성하고 대북송금 국민 앞에서 사죄했을 거다. 아니면 억지로라도 북한에 들어가 김정은에게 “네 이놈, 네가 이럴 수 있느냐!”고 피토하듯 고함쳤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DJ의 애국심, 그의 평화통일 신념을 믿고 싶다.

2016년 10월 9일 시민일보 전용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