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거 100주년', 안중근-하얼빈학회 공동회장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인터뷰

  • No : 343
  • 작성자 : 운영자
  • 작성일 : 2009-11-10 17:22:57
  • 분류 : 예전자료

■안중근 의거 100주년,


안중근·하얼빈학회 공동회장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우리는 왜 안중근을 ‘장군’으로 불러야 하는가


                                                                                    글|황란(자유마당 객원기자)


 올해 10월 26일은 안중근(1879~1910년)이 만주 하얼빈에서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이하 이토)를 주살(誅殺)한 지 100년째 되는 날이다. 이 사건은 동북아시아 근현대사에 ‘의거’로 또렷이 기록됐지만, 일찍이 ‘동양평화론’을 주창한 안중근의 사상은 세월이 흐르면서 희미해졌다. 안중근 의거 100주년 기념사업 준비에 바쁜 이태진 회장을 만나 안중근의 새로운 면모와 역사적 재평가를 들어보았다.


2008년 1월에 발족한 안중근·하얼빈학회는 원로 역사학자인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국사학)와 조동성 서울대 경영대 교수를 중심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지난해 동북아역사재단의 지원으로 ‘의거 99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를 연 데 이어 올해엔 훨씬 규모가 큰 100주년 기념행사(10월 27~28일 대한상공회의소)를 주관하게 되었다.


또 지난 8월 10일부터 18일까지는 한국철도대학과 공동으로 안중근이 활동했던 러시아 연해주와 중국 동북3성 일대를 직접 둘러보는 행사를 진행했다. 이 행사에는 동북아역사재단이 2천만 원을 지원해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철도대학 학생 및 기타 대학 학생 10여 명, 조선일보에 소설 〈안중근 불멸〉을 연재 중인 작가 이문열 씨 등 174명이 참가했다. 이 회장은 “안중근 장군의 독립운동 발자취를 직접 더듬어보는 매우 뜻깊은 행사였다”고 평가했다.


공용화폐 발행을 주창한 ‘동양평화론’


이 회장은 이토 주살과 안중근의 평화사상 사이의 연결 고리를 찾아 일견 모순되는 둘의 관계를 밝히고자 안중근이 옥중에서 쓴 미완성 원고인 〈동양평화론〉에 천착해왔다.


“옥중에 있을 당시 안중근이 갇혀 있던 방은 간수들 사무실과 같은 3~4평 크기의 장방형에 책상과 붓글씨를 쓸 수 있는 간이테이블은 물론 침상까지 갖춰져 있었어요. 안중근이 유묵을 많이 남길 수 있었던 이유죠.”


이 회장에 따르면 안중근이 옥중에서 글로 써서 남긴 것이 세 가지 있다. 첫째는 검찰 취조를 받을 초기인 1909년 11월 6일부터 쓰기 시작한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 15개 조인데 이후 12월 말까지 계속 취조를 받고 이듬해 1월까지 시간 여유가 생겨 탈고한 것으로 짐작된다. 둘째는 참고인 조사가 진행되던 1월부터 쓴 〈안응칠(안중근의 어릴 적 이름) 역사〉라는 그의 자서전이다. 여기엔 그가 어떤 환경에서 자라고 공부했는지, 또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자신이 한 일과 어떤 생각으로 거사를 감행했는지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2월 7~14일에 재판이 끝나고 2월 17~18일쯤 탈고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마지막으로 착수한 게 바로 〈동양평화론〉이었다. 사형이 집행된 3월 26일까지 한 달가량 시간이 있었지만, 본격적인 집필에 앞서 ‘예비적 고찰’만 끝내고 미처 본론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미완성 원고로 남았다.


일본 정부가 공개하지 않아 여태껏 소문에만 그쳤던 안중근의 저서들은 1970년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 동경본부 원장이 도쿄의 고서점에서 일본어로 번역된 〈안응칠 역사〉를 찾아내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책 속에 안중근이 〈동양평화론〉을 썼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후 1979년 무렵 일본으로 귀화한 한 포로가 일본 국회도서관에서 〈안응칠 역사〉 한문본을 찾아내고, 이어서 〈동양평화론〉 필사본(한문판)이 공개돼 1970년대 말에서야 이 두 가지 역사적 사실이 일반에게 알려지게 된 것이다.


미완성 원고인 〈동양평화론〉의 알려지지 않은 내용에 대해 이 회장은 설명을 이어갔다. “1995년 일본 외무성 자료가 보관된 ‘외교사료관’에서 7000페이지나 되는 엄청난 분량의 하얼빈 사건조사서류 뭉치가 발견돼 당시 국가보훈처에서 복사해서 영인본으로 출간했어요. 그때부터 안중근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진 거죠. 그 가운데 ‘청취서’라는 제목의 문서를 보면 1910년 2월 17일에 안중근이 법원장(재판관하고는 별개의 인물)에게 면회 신청을 하면서 ‘사형에 불만이 있다고 해서 목숨을 구걸하지 않겠다. 내가 지금까지 싸운 건 일본이 을사조약, 정미조약 등을 강제로 체결해 대한제국을 지배하는 잘못된 체제 자체를 부정하기 위해서다. 만약 그 체제에서 이루어진 이 재판에 대해 내가 상고한다면 체제를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상고를 포기한다’고 나와 있어요.


또 ‘이토가 동양평화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내세워 다른 나라의 국권을 찬탈한 것을 조선에 그치지 않고 만주까지 집어삼키려고 함으로써 더 큰 재앙을 막기 위해 나는 그것을 중단시키고자 죄악의 근원인 이토를 제거하는 행동에 나섰다. 만약 내가 이토처럼 일본을 이끌어가는 위치에 있었다면 내가 나아갈 방향은 따로 있었다’며 법원장에게 거론한 것이 ‘동양평화론’인데 이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내용입니다.”


그중 일부를 소개하면 “조선의 주권을 되돌려달라”, “국가 주권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천부의 권한으로 국민의 자유 양심에 의해 국가가 탄생해 내려오는 것인데, 이를 다른 나라가 빼앗는다는 것은 인간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반납하라”, “러시아 외에도 동양을 침략할 위험성이 있는 백인 국가가 여럿 있는데 이를 위해 한·중·일 3국이 힘을 합쳐 대항해야 하지 않겠느냐”, “뤼순을 일종의 공동군항으로 하고 대한을 회원국으로 해서 평화회의체를 두고 (동아시아를 지키는) 공동군단을 편성하자. 건장한 청년들을 모아 군단을 만들고 공동체 의식(형제 의식)에 의거해 두 나라 말을 모두 배워야 한다”는 구체적인 제안까지도 포함돼 있다.


또 경제적으로도 하나의 블록을 만들어 그 보호망으로 3국이 공동으로 사용할 화폐 발행과 이를 운영할 은행을 설치하자는 제안도 했다. 이 같은 내용은 〈청취사〉에서 ‘아주(亞洲)제일 쾌걸 안중근’이라는 흥미로운 이름으로 소개되었는데, 이는 중국 공산당의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안중근의 업적을 높이 평가해 만든 것이다. 이렇게 해서 1995년 관련 학자들에게 도입부만 일부 소개된 〈동양평화론〉의 구체적인 내용이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경제적 동양평화회의체 구상의 의의


한·중·일 3국의 금융공동체 구성에 대한 안중근의 착상(着想)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독일의 철학자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년)는 국제적 연맹 형태로 ‘국제국가’와 ‘평화연맹’을 설정했는데, 전자가 일본식 ‘동양평화론’에 해당한다면 후자는 안중근의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후자는 1919년에 결성된 ‘국제연맹’의 사상적 모태가 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안중근은 알자스로렌 지방 출신의 프랑스 신부 조제프 빌렘에게 프랑스어를 배우기도 했는데 그에게서 이 책을 전해 받아 읽었거나, 그 내용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칸트의 〈영구평화론〉은 이미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있었지만 내용 중에 금융 문제는 들어 있지 않았다.


“안중근이 〈동양평화론〉에서 제시한 한·중·일 3국의 금융공동체론은 칸트의 〈영구평화론〉에 뿌리를 둔 것이라고 하더라도, 1919년에 결성된 ‘국제연맹’보다 10년이나 앞섭니다. 오늘날 국제화 시대를 맞아 후손들이 이를 세상에 널리 알려 한국 경제가 세계 각국과의 협력 속에 평화적으로 공동 번영을 꾀해왔다는 역사적 사실로 삼아야 합니다. 그의 웅대한 경제사상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것이 안중근 의거 100년을 진정으로 기리는 첫 번째 사업이 되어야 합니다.”


안중근은 ‘의사’가 아닌 ‘장군’이다


이토를 저격한 뒤 하얼빈 역에서 체포된 안중근은 랴오닝 성 다롄에 있는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다. 재판정에 선 그는 이토 히로부미가 저지른 15항목의 죄상을 낱낱이 밝히며 늠름하게 재판에 임했다. 그는 “나는 개인 살인범이 아니다. 대한독립군의 참모중장으로서 적장을 살해한 것이니 전쟁에 참가한 포로에 관한 법을 적용할 것을 요구한다”는 말을 수차례 강조했다. 교전 중 군인들 사이의 총격에 의한 사살은 무죄로서 범법 대상이 아님을 강력하게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일제(日帝)는 이를 무시하고 그를 단순 암살자로 규정해 교수형을 언도했다. 이런 역사적 사실 때문에 안중근·하얼빈학회에서는 그를 개인 자격의 ‘의사’가 아닌 ‘장군’으로 부르고 있다.


“‘의사’라는 호칭이 전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자칫 개인의 살인 행위라는 일제의 판결 의도에 맞춰주는 꼴이 돼 오해가 생길 수 있어요. 아직까지 ‘장군’으로 호칭을 바꾸는 것이 적극적으로 논의되지는 않았지만 의거 100주년을 맞아 ‘장군’이라는 호칭을 병용하든지 ‘의사’를 ‘장군’으로 대체하는 문제를 분명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어요.”


안중근에 대한 연구와 이해는 이제 시작 단계일 뿐이며 앞으로 계속 학술적인 활동을 통해 발전시켜나가야 한다는 이 회장은 “안중근이 〈동양평화론〉에서 내세운 한·중·일 3국이 독립국가로서 국제적 연맹관계를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은 앞으로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과제인 ‘기미독립선언서’에 그대로 나와 있다”며 결과적으로 안중근은 근대적인 국민국가 창설에 앞장섬으로써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이 정신적 선도자 역할을 할 수 있는 발판을 이미 100년 전에 만들어준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안중근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일회성으로 끝나서는 안 되며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이는 앞으로 안중근·하얼빈학회가 앞장서 헤쳐 나가야 할 과제라고 덧붙였다.


안중근은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이자 가장 적극적인 활동가이며 투철한 사상가였다. 2009년 10월 26일 안중근 하얼빈 의거 100주년과 2010년 3월 26일 안중근 순국 100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우리에게는 안중근의 고귀한 평화사상을 받들어 남북 대결, 지역·계층·세대 간의 갈등과 대립을 뛰어넘어 국민 통합과 화합의 시대정신으로 승화시켜야 하는 책무가 주어진 것이다.(월간《자유마당》2009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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