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민주당 정부와 한-일 관계 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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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운영자
  • 작성일 : 2009-11-10 17:21:06
  • 분류 : 예전자료


일본의 정치혁명이 우리나라에 미치는 영향


미래지향적 한일관계? 지나친 낙관은 시기상조


                                                                      글|이원덕(국민대학교 국제학부 교수)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의 당선과 함께 일본 민주당의 약진으로 일본 정치 판도에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생활정치의 공약, 복지정책의 실현 등을 내세우며 일본 국민의 50년 넘는 정치의식을 뒤흔든 일본의 정치혁명은 성공할 것인가, 우리나라와의 정치역학관계는 어떻게 변할지 유심히 지켜볼 일이다.


전후 반세기 이상 동안 일본을 지배해온 자민당 정권이 지난 8월 30일 치른 중의원 선거에서 야당 민주당이 일으킨 광풍을 맞아 마침내 붕괴했다. 이번 선거는 가히 일본 정치사의 혁명이라 할 수 있다. 민주당은 480석 중 309석을 획득해 역사적인 대승리를 거둔 반면, 자민당은 119석을 얻는 데 그쳐 참담한 패배를 기록했다. 민주당의 압승과 자민당의 참패는 일본 정치의 기반을 뒤흔든 선거혁명으로 기록될 것이다.


고도성장 시대에 종언을 고한 일본


민주당의 압승은 자민당 지도부의 실정과 무기력, 관료지배체제의 폐단이 초래한 민심 이반의 반사이익으로 설명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에 파고드는 생활정치의 복원이라는 민주당의 선거 공약이 상당 부분 약발을 받았다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민주당은 중학생까지의 자녀를 둔 가정에 1인당 월 26만 엔의 자녀수당 지급을, 고령자에겐 최소 7만 엔의 연금 지급을, 임신부에게는 55만 엔의 출산수당 지급을, 그리고 청년 실업자에게는 직업훈련과 실업수당 제공을 약속하는 등 유권자의 피부에 직접 와 닿는 공약으로 표심을 끌어 모았다. 이 밖에도 민주당은 고속도로 통행료 폐지, 고등학교까지의 무상교육 실시, 퇴임 관료의 낙하산 인사 금지, 동일 지역구에서의 세습적 공천 금지 등 국민이 알기 쉬운 갖가지 개혁 과제를 매니패스토에 담아 선거운동을 주도했다.


고이즈미 정권 이후 1년짜리 총리 교체 등 무책임의 극치를 보이며 실정과 실언을 거듭해온 자민당 정권으로서는 ‘생활정치 복원’과 사회경제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과감한 복지정책의 실현을 기치로 내건 민주당의 전방위 공세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파벌정치와 세습의원의 구습에서 탈피하지 못한 채 동맥경화 상태에 빠진 자민당과 달리 민주당은 새로운 인물의 과감한 기용과 신세대 정치인의 수혈을 통해 확고한 정권 담당 능력을 꾸준히 제고해왔다.


그러나 이번 선거 이변은 1990년대 이후 꾸준히 진행되어온 자민당 정권의 지지기반 하락 추세의 연장선에서 파악할 수 있다. 냉전체제의 붕괴와 더불어 일본 정치권의 총보수화가 진행되는 속에서 자민당은 자유주의 진영의 수호자 역할을 더 이상 독점할 수 없게 되었다. 또 버블경제 붕괴와 일본 경제의 장기침체는 고도 경제성장을 견인하며 이익분배형 정치를 구현해온 자민당에 더 이상 스스로의 지지세력과 지지계층에 나눠줄 자원의 고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자민당 장기집권의 기반인 냉전과 고도성장 시대의 종언은 자민당 정치의 몰락을 초래한 구조적 배경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민주당 신정권의 등장은 일본 정치에 대대적인 변화와 개혁의 신호탄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자민당의 우월 정당제가 특징인 ‘55년체제’는 마침내 이번 선거를 계기로 완전히 종지부를 찍고, 그 대신 자민당–민주당 중심의 양대 정당 시스템이 정착할 것으로 전망된다.


만년 여당의 역할을 담당해온 자민당은 사상 초유의 참패를 딛고 조직 재건과 세력 복원에 나서겠지만, 당분간 혼돈과 좌절의 늪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민주당은 총선에서의 압승을 바탕으로 국내 정치 분야와 사회경제정책을 중심으로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를 추구하면서 내년 여름 참의원 선거 의 승리에 당력을 집중할 것이다. 이번 총선을 계기로 일본의 정당 시스템은 자민당과 민주당이라는 양대 정당이 중심축을 형성해 정권 획득을 치열하게 다투는 본격적인 경쟁 구도로 이행될 것으로 점쳐진다.


민주당 정권의 출현을 계기로 일본 정치는 관료 주도에서 정치 주도로 권력 이동이 급속도로 진행될 것이다. 자민당의 장기집권 아래에서 고도 경제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해온 관료제는 일본 국가의 중요한 의사 결정을 거의 독점해왔다고 할 수 있다. 국가 예산의 편성부터 산업·금융정책에 이르기까지 국가 자원의 배분을 주도하는 한편, 시장에 대한 각종 규제와 인허가권 그리고 행정지도를 통해 일본 관료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해왔다. 관료가 막강한 지위와 권한을 갖는 일본적 시스템은 일본 국민에게 정치안정과 경제성장이라는 혜택을 선사해주었다.


그러나 관료지배체제는 동시에 수많은 폐단과 모순을 잉태했다. 국가 예산 낭비, 관료조직 상층부의 무분별한 아마쿠다리(낙하산 인사) 관행, 천문학적인 재정적자 그리고 무분별한 규제 남발, 업계와의 유착과 부정부패를 양산하기도 했다. 민주당 정권은 향후 관료 주도의 정치 행태가 초래한 모순과 왜곡을 바로잡기 위한 과감한 개혁 드라이브에 나서게 될 것이다. 민주당의 정권 공약은 관료 주도 정치를 타파하기 위해 정치인과 전문가 그룹으로 구성되는 국가전략국을 설치해 관료 조직에 대한 전면적인 관리와 통제에 나설 것을 내세우고 있다. 또 각 성청에 정치인 100명을 파견해 관료조직을 확실히 다스리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한일 과거사 갈등 해소, 기대해도 좋을까?


이번 총선의 쟁점은 주로 국내 정치 문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민주당 신정권이 집권 후 외교안보정책상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소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민주당은 정권 공약을 통해 대등한 대미관계의 추구와 아시아를 중시하는 외교를 펼치겠다고 공언해왔기 때문에 일정수준에서의 외교정책상 기조 변화가 감지된다. 이런 맥락에서 민주당 정권이 펼치게 될 한반도 정책에도 적지 않은 긍정적인 방향으로의 변화 조짐이 표출될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민주당 정권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한일관계는 우호협력관계에 청신호가 켜진 것으로 판단된다.


무엇보다 자민당 정권의 수뇌부와는 달리 민주당 지도부는 역사인식 문제에서 전향적이고 건전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며, 군사 문제나 헌법 문제 등 외교안보정책에서 다소 유화적이고 온건한 노선을 지향하는 것은 틀림없다. 최근 한일관계 악화 배경에는 일부 자민당 우파 지도자들의 시대착오적 역사인식이나 섣부른 민족주의적 발상 그리고 부적절한 언행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민주당 정권의 출현을 계기로 한일관계는 불필요한 마찰과 대립을 넘어 미래지향적 협력을 추구하는 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 여지가 넓게 열려 있다고 생각된다.


하토야마 총리는 ‘동아시아 공동체 수립’과 ‘아시아의 공동통화 구상’을 그의 아시아 중시 외교의 비전으로 주장한 바 있다. 또 자민당 정권하에서 격렬한 역사 마찰의 뇌관으로 작용해온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중단하겠다고 명확한 입장을 표명했다. 더 나아가 야스쿠니 문제를 정면 돌파하기 위해 제3의 국립추도시설 건립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이 공약이 무난하게 실현될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적어도 민주당 집권 기간 중에 야스쿠니 문제가 한일관계와 중일관계의 외교적 악재로 등장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점에서 매우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 밖에도 민주당 지도부는 정권공약과 선거유세, 기자회견 등을 통해 한일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기대되는 언급을 표명한 바 있다. 첫째, 역사인식 문제와 관련해 1995년 자민당–사회당 연립정권하에서 발표한 무라야마 담화를 답습, 공유하겠다고 약속했으며, 이를 실천적으로 계승하겠다고 공언했다. 둘째, 재일 한국인에게 지방 참정권을 부여하는 입법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을 약속했다. 셋째, 종군위안부를 비롯한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전후보상 문제에 관해서도 전향적인 입장을 언급했다.


민주당 지도부의 이 같은 일련의 발언이 액면대로 실천에 옮겨진다면 한일관계의 최대 장애물 중 하나인 과거사 마찰 이슈는 상당 부분 약화되거나 해소되는 방향으로 진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 정권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한일 과거사 갈등의 불씨가 쉽사리 꺼졌다고 보기에는 여전히 개운하지 않은 점이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이번 선거혁명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치의 보수적 지형이 근본적으로 변화했다고 볼 수는 없다.


또 민주당 내 좌우에 걸친 다양한 이념과 정책의 혼재 상황을 고려하면 향후 한일관계에 대한 과잉 기대나 지나친 낙관은 시기상조라고 말할 수 있다. 일단 야스쿠니 참배, 전후보상, 과거사인식 문제와 관련한 정치권 내의 반동적인 움직임은 민주당 정권하에서 상당 부분 억제되겠지만 한일 간에 역사 마찰이 재현될 가능성은 여전히 뿌리 깊게 존재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북일관계와 관련해서는 민주당 정권이 단시일 내에 새로운 대북정책을 추구할 가능성은 그다지 높아 보이지 않는다. 북한의 일본인 납치에 대한 반발과 불신이 워낙 뿌리 깊을 뿐 아니라 북한 핵, 미사일 문제에 대한 위협과 경계심이 일본 사회 전체에 만연해 있기 때문에 민주당 정권으로서도 대북정책을 근본적으로 전환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다만 장기적으로 볼 때, 북한의 대일 자세 변화에 따라서 민주당 정권이 북한과의 대화와 협상에 응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높을 것이다. 자민당의 대북제재 일변도 정책을 넘어서 민주당 정권은 새로운 대북 접근을 시도하고 대화와 협상을 통해 수교협상의 물꼬를 트려고 나름 노력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 경우,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는 대북외교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외무성 주도의 접근보다는 민주당 내의 거물 정치인의 결단이 큰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보인다.(월간《자유마당》2009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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