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 영유권 분쟁과 동북아 배타적 영토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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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운영자
  • 작성일 : 2010-11-17 17:40:48
  • 분류 : 예전자료

동북아의 배타적 영토 갈등, 새로운 국제 문제로 부상
중일 영유권 분쟁, 뜨겁게 불붙다


최근 일본과 중국 사이에 ‘센카쿠열도–댜오위다오’에 대한 영유권 주장이 심각한 상황으로
전개되면서 동북아 영토분쟁에 대한 재고의 분위기가 일었다. 동북아에 모여 있는 강대국 일본, 중국, 러시아 그리고 한국은 실질적 영토분쟁을 겪고 있다. 21세기의 영토분쟁 해결책은 과연 무엇인가.

김성철 /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일본제국의 성장과 패망이 가져온 동북아 영토분쟁

일본은 한국과 ‘독도–다케시마’의 영유권을 두고 분쟁 상태에 있고, 중국과는 ‘센카쿠열도–댜오위다오’를 두고, 러시아와는 ‘남쿠릴열도–북방4도’의 영유권 분쟁문제를 안고 있다. 일본은 독도를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1905년 자국 영토로 편입했고, 센카쿠열도는 청일전쟁 이후 1895년 대만과 함께 점령했으며, 남쿠릴열도는 태평양전쟁에 패한 1945년 소련에게 점령당했다. 한 마디로 동북아의 영토분쟁은 일본제국이 19세기 말 성장했다가 20세기 중반 패망하면서 발생한 역사적 상황, 전쟁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영토분쟁이 21세기에도 재발하는 원인으로 두 가지 분석 요인이 작용한다. 첫째는 태평양전쟁 이후 전후 처리가 미완의 상태로 남아 있다는 점이고, 둘째는 19세기 말~20세기 중반과 유사한 국제적 상황이 21세기에도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선 첫째 요인과 관련해서 살펴보면 태평양전쟁 이후 1945~1952년 미군정이 일본을 지배하던 시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1년)이 조인되면서 동북아의 영토 문제를 규정지었는데, 강화조약 내용은 동북아의 역사에 기초한 합리적 결정이라기보다는 동북아에 대한 미국의 정치적 고려가 상당히 작용한 결정이었다.

중일 간의 센카쿠열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살펴보면, 19세기 말까지 중국이 관할했고(중국의 입장), 1895년 일본이 대만과 부속 도서를 할양(국가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져 자기 나라 영토의 일부를 다른 나라에 넘겨주는 것)하면서 오키나와에 편입시켰고, 1945년 오키나와와 함께 미국에 이양되었으며, 1972년 오키나와와 함께 일본으로 반환되었다는 것이다(일본의 입장). 결국 미국은 센카쿠열도의 영유권에 대한 판단을 자의로 내리지 않고 기존 체제를 그대로 인정했거나 정치적 고려를 했을 수 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도 센카쿠열도는 일본 영토로서 미국의 관할 상태에 있었다.

센카쿠열도–댜오위다오는 현재 일본과 중국, 대만의 영토로 등록되어 있고, 영유권을 두고 수차례에 걸친 충돌이 있었다. 1978년 당시 덩샤오핑 중국 부수상이 영유권 문제와 관련해, 일단 보류하더라도 다음 세대에 해결방안을 찾아낼 것이라고 한 발언이 현재까지 중국의 외교적 입장으로 유지되어 왔으나, 최근 중국의 외교 안보정책이 좀 더 적극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조짐이 보인다.

세계경제 시스템 붕괴가 영토분쟁 발생의 배경

동북아에서 21세기에도 영토분쟁이 발생할 수 있다는 둘째 요인과 관련해 살펴보자. 일본은 1870년대 메이지유신을 거쳐 근대국가를 형성하면서 동아시아로 제국을 확장해나가는 과정에서 1930년대 세계적 경제대공황을 겪었고, 군부세력의 등장으로 제2차 세계대전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세계대전의 근저에는 정치·경제적 요인이 크게 작용했고 이는 영토분쟁과 자원쟁탈전과 연계되어 있었다.

국제정치이론의 패권안정이론에 의하면 기존의 패권국가가 쇠퇴할 때 세계경제 시스템의 안정성이 붕괴되면서 국가 간 분쟁과 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찰스 킨들버거에 의하면 1929~1934년에 발생한 경제대공황(Great Depression)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영국의 경제 패권이 무너지고 세계경제 시스템을 유지할 패권국가가 없는 상태에서 각 국가가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면서 보호무역주의를 취해 갈등과 분쟁이 고조, 경제공황과 파시즘의 대두와 함께 제2차 세계대전으로 전개되었다고 분석한다.

“세계경제 시스템을 유지·관리하는 패권국가가 쇠퇴하는 경우 이를 대체하고 보완할 다자주의적 국제기구를 활성화해 긴밀한 대화와 협의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제도주의 이론가 로버트 코헤인은 역설한다. “패권국가가 쇠퇴할 때 새로운 도전국가가 등장하면 양 진영 사이에 패권전쟁이 발발할 수 있다”고 현실주의 이론가 로버트 길핀(Robert Gilpin)은 경고한다. 역사학자 폴 케네디는 “패권국가인 제국이 쇠퇴하는 원인은 과도한 팽창과 비용 지출에 의한 재정 붕괴에 있다”고 설명한다.

2008년 발생한 미국 경제위기의 국제 정치적 의미를 생각해보면 우선 미국 패권의 쇠퇴가 가시화된 것이 아닌가 한다. 아프간전쟁과 이라크전쟁을 거친 대테러 전쟁이 큰 성과 없이 진행되는 가운데 미국의 과도한 전쟁 비용과 경기 침체, 금융산업의 무분별한 투자가 경제위기를 불러오고 실물경제에까지 영향을 미쳐 미국 경제뿐만 아니라 세계경제의 장기 침체를 부른 것이 결국 미국의 세계 패권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한 것이다.

미국 경제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거치게 되었고 세계경제 시스템도 변환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패권에 의해 관리되던 세계경제 시스템이 미국 패권의 상대적 약화와 함께 미국, EU, 일본, 중국 등을 중심으로 한 다자주의적 시스템으로 바뀔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G20 정상회의와 같이 선진국 G7에 신흥경제국이 공동으로 참가해 세계경제 문제를 논의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다자주의적 시스템의 발전이 가능하게 된 이유다.

미국 패권이 약화되면 기축통화로서 달러가 약세를 보이고 유로, 엔, 위안화가 상대적으로 강화될 수 있다. 자유무역이 상대적으로 쇠퇴하고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대두되면서 자원과 에너지 등을 위한 경쟁·갈등이 고조될 가능성이 있다. 그루지야, 티베트 사태와 영토분쟁 등의 소규모 갈등과 전쟁이 발생할 수 있다. 패권국가가 쇠퇴할 때 국제질서와 협조 시스템이 효과적으로 유지될 것인가 하는 다자주의체제의 실효성이 문제 될 수 있다. 미국이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세계경제 시스템을 원만하게 재편하고 유지·발전시키고, 국가 간 갈등과 분쟁을 효과적으로 제어하고 조정하는 국제기구를 관리·유지하는 데 기여하는 중대한 역할을 원활히 수행해야 할 것이다.

동북아에서 중국과 일본 간의 영토분쟁이 격화되는 것은 미국 패권의 쇠퇴 속에서 G2로 부상하는 중국이 경제적·군사적으로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영토분쟁과 자원 쟁탈전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려는 조짐이라고 볼 수 있다. 덩샤오핑 이래 중국은 개혁·개방으로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루면서 미국의 패권을 건드리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운 행보로 도광양회(韜光養晦:빛을 감추고 때를 기다림)와 화평굴기(和平崛起: 평화적 부상)의 전략을 취해왔다. 그러나 2008년 미국 경제위기 이후 유럽과 일본의 경제마저 흔들리면서 명실상부한 G2의 지위에 올라서게 된 중국이 서서히 자국의 국익을 위한 적극적인 외교 전략을 취하기 시작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전쟁 역사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합리적 세계이성 필요

중국이 최근 댜오위다오 영유권을 강력히 주장하는 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있다고 본다. 첫째는 2008년 미국의 경제위기 이후 중국이 명실상부한 G2의 강대국으로 부상했다는 것을 자인하고 화평굴기와 도광양회의 소극적 외교 전략에서 벗어나 보다 적극적인 국익 위주의 외교 전략을 취하기 시작했다는 조짐으로 볼 수 있다.

둘째는 최근 한반도 주변 동북아 정세가 천암함 사태 전후에 한국·미국·일본의 협력이 강화되면서 북한·중국·러시아와 대립각을 세우는 신냉전 구도가 형성되자, 중국과 한국의 관계가 다소 소원해지듯이 중국과 일본의 관계도 멀어지는 듯한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1895년과 1930년대 중국과 일본 간 전쟁의 과거사가 되새겨지면서 양국의 민족주의가 재확인되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과거사와 민족주의를 넘어서 자원 에너지를 위한 영토분쟁으로 확대될 수 있다. 일본은 장기적 경제 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중국과의 경제협력이 긴요한 상황에서 중일 간 영토분쟁이 심화되면 경제적 타격을 입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이를 예방하기 위해 정치·경제·안보 문제를 분리해서 대처하는 외교 전략이 필요하다.

일본의 국내 요인을 살펴보면, 2005년과 2010년은 일본이 과거 제국의 확대와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해나간 1905년과 1910년의 100주년 기념 해이다. 과거의 영광을 되새기고 새롭게 일본의 재건을 추구하는 중대한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다. 2005년에는 자민당의 고이즈미 정부가 역사 교과서와 영토분쟁 등에서 일본의 입장을 우선하는 강력한 아시아 정책을 전개해서 중국과 한국 등 아시아에서 반일운동이 심하게 발생했다. 2009년 9월취임한 민주당의 하토야마 정부는 대동아공영권을 연상시키는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을 추구해서 아시아 국가들로부터 반신반의의 평가를 받았다.

하토야마 정부는 긴밀하고 대등한 미일관계와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을 제창하고 자립외교를 추구했으며, 집권 기간 중 오키나와 후텐마기지 이전 문제, 핵 밀약 공개, 도요타자동차 리콜 사태 등 미일관계에서 굵직한 사건들이 발생했다. 또 미일동맹의 근본적 변화를 시도했다가 결과적으로 실패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일본 민주당 정부는 출범 후 미국 의존 탈피와 아시아 중시외교를 주창해왔으나, 미국을 상대로 자립외교를 펴기에 어려움을 겪고 한계를 느끼면서 미일동맹의 강화 노선으로 선회하는 분위기다.
최근 천안함 사태와 같은 북한의 위협과 중국의 부상이 미일동맹의 강화와 한·미·일 공조 분위기를 야기시키고, 중국군 헬기가 일본 해역 인근에서 위협적 비행을 하는 등 중일 간에 외교 갈등이 드러나고 있다.

결론적으로, 중국과 일본의 지도자가 과거사를 되새기면서 민족주의적 이념을 가지고 정치·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 영토분쟁과 자원 쟁탈전 같은 역사가 동북아에서 재현될 수도 있다. 세계화와 정보화가 문화화·제도화된 21세기에서 전쟁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세계 이성의 합리적 역할이 매우 필요한 시점이다.(월간《자유마당》2010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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