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독립을 목청 높여 부른 군산 3.1운동의 주역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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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22-03-03 13:31:12
  • 분류 : 자유마당

포커스 - 이달의 독립운동가

한국의 독립을 목청 높여 부른 군산 3.1운동의 주역들

- 고석주·이두열·윌리엄 린튼·김수남 -

 

 

풍요롭기에 슬펐던 식민지 도시 군산에서 울려 퍼진 독립만세의 함성

191931일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의 물결은 독립선언서와 함께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수많은 독립선언서가 손에서 손으로 전해져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지는 와중에 하나의 물줄기가 군산으로 이어졌다. 35일 군산 옥구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의 함성은 3월과 4월 내내 전라북도 곳곳에서 울려 퍼진 함성의 신호탄이었다.

드넓은 호남평야를 등 뒤에 두고 금강을 통해 바다로 향한 군산은 풍요롭기에 슬플 수밖에 없었던 식민지 도시였다. 1899년 개항 이후, 일본은 조선의 쌀을 수탈하기 위한 미곡 수출항으로 군산을 주목하였다. 많은 일본인들이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특히, 지주와 기업가 출신의 일본인들은 조선총독부의 비호 아래에서 대규모 농장을 건설하여 미곡 생산과 수출을 독점하기 시작하였다. 반면 군산의 조선인들은 일본인 농장의 소작농이 되거나, 낮은 임금을 받고 부두에서 힘겨운 육체노동을 감수해야 하였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가속화되어 조선인들은 경제적, 사회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어야 하였다.

이러한 힘든 상황에서도 군산 사람들의 민족교육에 대한 의지는 매우 컸다. 1917년에 군산 청년야학이 설치된 것을 시작으로, 민족교육을 위한 많은 학교들이 설립되었다. 이 흐름의 한 축을 담당한 것이 미국 남장로교 계열의 영명학교와 멜볼딘여학교였다.

18964, 전킨(William M. Junkin, 전위렴)과 드루(Alessandro D. Drew, 유대모)라는 두 명의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군산에 교회를 짓고 남장로교 선교를 시작하였다. 1900년 하나의 선교 지역에 교회와 병원, 학교를 모두 갖추어 전도 효과를 극대화하기로 결정한 남장로교의 제9차 연례회의에 따라 군산에도 구암교회, 군산예수병원 그리고 영명학교와 멜볼딘여학교가 설립되었다. 학교에는 신앙의 힘을 통해서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많은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이 교사로 근무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항일의식을 교육을 통해서 학생들과 공유하면서, 우리 민족의 독립을 소망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이 3.5 군산 만세 시위였다. 군산의 3.1운동은 영명학교와 멜볼딘여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주도하고 구암교회의 교인과 예수병원 직원들이 다수 참여하여 인근의 주민들과 협력하면서 시작되었다.

 

군산 3.5 만세 시위를 주도한 교사들 - 고석주, 이두열

군산의 3.5 만세 시위는 전북 김제 출신으로 영명학교를 졸업하고 세브란스 의전을 다니던 김병수로부터 출발하였다. 1919226일 김병수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이갑성으로부터 고향으로 내려가 만세운동을 일으켜달라는 부탁과 함께 독립선언서 200장을 전달받았다. 김병수는 그날로 기차에 몸을 싣고 모교인 영명학교로 향하였다. 평소에 민족의식이 강했던 교사들을 떠올리며 그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군산에 도착한 김병수는 곧바로 스승인 영명학교 교사 박연세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를 통해 영명학교와 멜볼딘여학교 교사들을 소개받았다.

함경남도 영흥 출신인 이두열과 전북 옥구 출신인 고석주도 이 자리에 함께 하였다. 이두열은 영명학교 교사였고, 고석주는 구암교회 부속 여학교 교사였다. 두 사람은 같은 교사였던 박연세, 김수영 등과 함께 36일 군산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펼치기로 결의하였다. 한편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준비할 필요성을 느낀 이두열과 고석주는 시위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하였다. 가장 먼저 만난 사람들은 같은 교회 소속의 예수병원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이었다. 이준명, 양기준, 유한종, 양성도, 안경태, 임병률, 이진규, 김준실, 송기주, 이재근 등이 이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시위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다음으로 만난 사람은 교회 신자들이었다. 김성은, 유희순, 임종우 등이 계획에 동참하였다. 마지막으로 교사였던 그들과 함께 민족의식을 기르던 학생들이 참여하였다. 영명학교의 학생이었던 양기철, 전세종, 김영후, 송기옥, 이도준, 홍천경,

고준상, 유복섭, 오한길, 강규언, 강인성 등이 계획에 동참하기로 결정했다.

이두열과 고석주, 두 사람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는 일이었다. 교사들과 학생들은 영명학교 안에서 학교의 등사판을 이용해서 비밀리에 독립선언서 수천 장을 인쇄하였다. 36일을 향하여 차근차근 준비되던 시위 계획은 불행히도 거사를 하루 앞두고 일제에 발각되고 말았다. 영명학교에서 만세 시위가 준비된다는 첩보를 들은 일제 경찰이 들이닥치면서 준비하던 독립선언서가 발각된 것이다. 일제 경찰은 이두열과 고석주를 비롯한 교사들과 학생들을 체포하였다.

교사와 친구들이 잡혀가는 모습을 본 학생들은 예수병원 사무원, 교회 신자들과 함께 남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뿌리면서 만세 시위를 시작했다. 거리에 있던 민중들도 이에 화답하면서 만세 시위는 더욱 커졌다. 민중들은 군산경찰서로 몰려가, 체포된 교사와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만세를 불렀다.

일제 경찰은 이리에 주둔하던 헌병대까지 동원하여 시위 군중을 탄압하였다. 그리고 체포된 군중들에게는 가혹한 고문과 재판이 기다리고 있었다. 체포된 이두열은 1919430일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고석주도 같은 재판에서 같은 죄목으로 징역 16월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고석주는 출옥한 이후에도 민족운동에 투신했고, 충남 서천에 교회를 개척해 계몽운동과 농촌운동에 힘썼다.

 

군산 만세 시위를 지원하고 해외에 알린 영명학교 교장 윌리엄 린튼

당시, 학교의 교장이던 윌리엄 린튼은 이들의 준비를 묵인하고 은밀히 지원하였다.

조지아 공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린튼은 191222살의 나이에 선교사로 식민지 조선에 도착하였다. 당시에 최연소 선교사였던 린튼은 곧바로 군산 선교지부에 속한 영명학교에서 교육선교를 시작하였다. 1년 만에 한국어를 능수능란하게 익힌 다음에 우리말로 성경을 가르치고, 또 영어를 가르쳤다. 1917, 전임 베너블 선교사가 한국을 떠나면서 린튼은 영명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1919, 린튼은 일제가 군산에서 발생한 만세 시위를 잔혹하게 탄압하고 교사와 학생들을 고문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후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돌아간 린튼은 애틀랜타에서 열린 남장로교 평신도 대회에 참석하여 일제의 잔학한 식민통치와 한국인들의 저항을 생생하게 증언하였다. 그리고 지역 신문인 애틀랜타 저널에 한국인들이 어떻게 자유를 추구하는지에 대한 한 애틀랜타인의 증언(Atlantian tells how Koreans are seeking liberty)’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의 상황을 기고하였다. 이후에도 린튼은 계속하여 한국독립의 필요성과 지원을 주장하였다.

“31일 전국에서 남녀노소를 불문한 인파가 쏟아져 나왔다. 폭력이나 무질서는 없었다. 일본 정부가 이 봉기를 억누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참가자들을 체포하는 것이었다. 감옥은 한국인들로 차고 넘쳤다. 어린이도, 노인도, 양반도, 종도, 그야말로 모든 사람이 있었다. 수천 명의 항일운동가들이 총검에 짓밟혔으나 누구도 (폭력적) 저항을 하지 않았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린튼은 전주 신흥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던 중,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였다. 결국 신흥학교는 폐교되었고, 린튼은 1940년 일제에 의해서 추방되었다. 광복 이후에 한국으로 돌아온 린튼은 1960년 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국에서 교육사업에 종사하였다.

 

식민지 교육을 불태운 노동자 김수남

35, 한 차례의 만세운동이 군산을 휩쓸고 간 이후에도 군산에서는 만세 시위를 계속해서 일으키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군산 출신으로 노동자로 일하던 김수남도 그중의 하나였다. 김수남은 동료였던 이남률과 함께 다시 한번 만세 시위를 일으킬 계획을 준비하였다. 잡화상인 권재길, 학생인 문종묵 등이 이 계획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315일부터 군산 강호정의 도로, 노동조합사무소 등지에서 같은 노동자들에게 만세 시위를 벌이자고 요청하였다. 권재길과 문종묵도 군산공립보통학교를 비롯하여 군산 지역 학생들에게 만세 시위를 벌일 것을 요구하는 문서를 만들어 배포하였다.

그러나 일본인 교장과 교사들이 학생들을 엄하게 감시하고 속박하던 당시 군산공립보통학교에서는 쉽게 만세 시위를 준비할 수 없었다. 김수남은 그런 학교를 바라보면서, 식민지 교육에 대한 분노와 억압받는 학생들에 대한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항일의식의 표출로써, 큰 건물인 공립학교를 불태워서 민족독립의 열망을 표현하기로 결정하였다.

322, 군산부 명치정 거리에서 이남률과 만난 김수남은 군산공립보통학교를 불태우기 위한 계획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이남률은 신분을 속이고 군산부 전주통의 신림약국에 가서 은밀히 알코올을 구매하였다. 김수남은 장재동에서 불쏘시개로 사용할 솜을 구매하였다. 이윽고 323일 밤 11시에 다시 모인 두 사람은 인기척이 없는 학교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학교 건물 동남쪽 출입구에서 솜에 알코올을 적신 다음, 성냥으로 불을 지폈다. 맹렬히 타들어간 불은 학교 건물 1개 동을 전소시켰다.

방화 이후에 일제 경찰에 붙잡힌 김수남은 1919524,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방화죄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아 복역하였다.

 

한강 이남에서 가장 먼저 독립만세가 울려 퍼진 군산

군산의 3.5 만세 시위는 한강 이남에서 벌어진 독립선언 만세운동이었다. 영명학교의 교사들과 학생들이 계획한 시위 운동은 군산 민중들의 참여로 이후 전라북도 곳곳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의 불쏘시개가 되었다. 또한 천도교계에서도 옥구군지부를 중심으로 독립선언을 계획하고 기독교계와 연합하여 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였다.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만세 시위운동이 계획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종교계와 교육계 그리고 노동계가 조직적으로 계획하고 전개한 군산의 3.1운동은 전 민족적, 전 민중적 봉기라는 3.1운동의 성격을 여실히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의미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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