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일은 비가 내렸다. 혼자 켜놓은 TV는 추념식을 보여주었고, 심심한 나는 거실을 왔다 갔다 하다가 어느 장면에서 TV 앞에 멈췄다. 좋아하는 탤런트가 ‘어느 손녀가 할아버지께 보내는 편지’를 떨리는 소리로 읽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김 소위님의 이야기는 늘 그렇게 시작되었죠. 서로 이름도, 사정도 나눌 새 없이 황 소위, 김 소위라는 짧은 인사 후 전투에 참여하였고, 안타깝게도 김 소위님은 바로 전사하였다고 하셨죠.”
나는 숨을 죽이고 TV 음량을 높였다. 편지를 들으며 가슴은 더욱 두근거렸다. 이런 적은 없었다. 내가 왜 이러지, 하고 있는데 불쑥 누나가 나타났다. 누나는 TV와 나를 번갈아 보며 뭔가 수상하다는 듯 물었다. ”유성아, 왜 그래?“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며, 창문으로 시선을 돌리고 몰래 눈물을 닦았다. 추념식이 끝나고 TV 화면은 ‘대한민국을 지켜낸 당신의 희생을 기억합니다’로 가득 채워졌다. 어느 새 창밖에는 비가 그쳤지만, 세상은 더욱 촉촉해보였다.
그리고 나는 하루 종일 편지에 나오는 황 소위님과 김 소위님 이야기, 6.25전쟁, 낙동강 전투, 현충일 등에 대해서 인터넷을 찾아다녔다.
”황 소위님(황규만 장군님)은 6ㆍ25전쟁 직후 낙동강 근처 안강 전선에서 김 소위님을 만났고, 전투 중에 돌아가신 김 소위님을 급하게 소나무 아래 묻어드렸다. 전쟁이 끝나고 김 소위님 유해를 어렵게 찾아 현충원에 묻어주셨지만 그때까지 김 소위님의 이름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40년이 지난 1990년, 황 소위님은 기적처럼 김 소위님의 이름과 가족까지 찾아주셨고, 2020년 돌아가시며 생전 소원대로 김 소위님 바로 옆에 나란히 묻히셨다.“고 했다. 나는 울컥하며 두 분이 너무 보고 싶었다.
다음 주말, 나는 아빠와 함께 현충원을 찾았다. 처음 본 현충원은 엄마 품처럼 산등성이에 안겨 있어 아늑하고, 확 트인 전경에 시원스레 보였다. 하지만, 그건 잠시였고 착시였다. 산마루까지 끝없이 펼쳐있는 수없는 묘역에 먹먹함이 차올라, 함부로 숨을 들이쉴 수 없었다. 높고 푸른 하늘마저 무거워 보였다. 두 분을 찾아가는 길에서, 나는 ‘자유야 기억해’에서 보았던 현충일의 의미를 떠올렸다.
”아빠, 왜 현충일이라고 하는지 알아?“
”호국영령의 충성을 기념해서 현충일이라고 하는 것 같은데...“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현충은 충성을 보여준다는 뜻이래. 나도 까먹고 있다가 이곳에 와 보니까 다시 생각났어. 여기 잠들어 계신 분들께서 어떻게 나라를 지켜주셨는지가 보여.“
두 분의 묘역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두 비석, 70년 전 서로의 이름조차 나누지 못하고 삶과 죽음으로 헤어진 동지는 이제 돌이 되어 영원히 함께 있었다. 김 소위의 묘비에는 이름과 가족을 되찾았음에도 여전히 이름 없는 ‘육군소위 김의묘’로 새겨 있었고, 그 아래 다른 추모석에서 김 소위님의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숙였던 고개를 올렸다. 각각의 묘역은 마치 하나의 성채가 되어, 거대한 군영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아빠 손을 꼭 붙잡고 묘역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성채마다 꽂혀있는 비석들, 어떤 비바람에도 끄떡없었지만 내가 다가가자 깃발처럼 나부끼며 말씀하시는 듯했다.
‘내가 목숨으로 이 나라를 지켰는데, 죽었다고 어찌 다르겠는가!’
나는 전쟁의 아픔과 슬픔이 가득한 이곳에서 잊고 있던 자유를 되새겼고 그래서 더욱 무서웠다.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생각조차 못할 만큼, 내가 얼마나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고 있으며, 이처럼 길고 깊은 평화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올림픽도로는 주말 놀러가는 차들로 꽉 막혔다. 서로 조금이라도 빨리 가려고 끼어들고, 이것을 못 참고 빵빵거리고. 평소 같았으면 나 역시 심한 교통체증에 짜증이 냈을 텐데, 그럴 수 없었다. 불편함마저도 희생으로 지켜낸 자유이기에. 불편함을 누릴 자유라니, 그 얼마나 소중한가!
우리가 마음껏 누리고 있는 평화는 호국영령의 희생으로 저축해 둔 것이다. 그 소중함을 잊고 지금처럼 마구 쓰다보면 언젠가 전부 사라질 텐데, 하는 생각에 섬뜩했다. 우리는 우크라이나 전쟁은 얘기하지만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는 침묵한다. 이제는 꼭 기억하자, 자유를. 결코 잊지 말자, 희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