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글짓기대회] 은상-고등부 진한준 '어디에나 있고 얻기 어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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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22-08-18 12:4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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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전국나라사랑 글짓기대회 수상작

은상 - 초등부 이수민(경산평산초등학교 6년)

어디에나 있고 얻기 어려운

사전이 이야기하는 자유의 의미는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를 일컫는다. 그러나 나 스스로 판단한 영상이 표현하는 자유는 더 넓은 의미였다. 단순히 내 행동을 제재하는 무엇이 없는 것이 아닌, 가난과 전쟁에서 벗어나 자신의 목표를 설정하고 이루는데 거리낌이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자유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바탕으로 자신과 타인의 자유를 함께 지향해야 하는 것이다.
지구 전체를 공포를 몰아넣었던 전쟁이 마무리되고, ‘원조’ 혹은 ‘복지’ 등을 위한 기관들이 생겨났다. 지금까지도 많은 관심이 필요한, ‘사회복지’ 또한 자유를 위한 움직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나도 이 영상을 시청하기 전까지는 이 둘의 상관관계를 발견하기 어려웠다고 고백하고 싶다. 왜 ‘한국 자유 총협회’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한 복지를 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차근차근 생각해보며 납득할 수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자유’라는 단어를 일상생활에서 남발하면서도 정확한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던 것은, 모두가 마땅히 그것을 가지고 있을 거라 넘겨짚었기 때문이다. 가끔 어른의 입에서 오고 가던 독재, 탄압, 전쟁의 흔적은 퇴색되어 일어나지 않은 신화처럼 전승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잊지 않으려는 노력은 쉽게 좌절된다. 겪은 적 없는 대다수 사람은 자유는 천부적으로 발생하는 것으로 알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 얻은 자유 아래 투쟁이 묻혀 있음을, 순국선열께 감사해야 함을 깨닫지 못한다. 그로 인해 사회는 희생을 혐오하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일상을 살며 만연한 이기주의는 대물림되어 함께 살아가는 대한민국을 꿈꾸었던 선대의 노력을 무력화한다고 느껴졌다. 이러한 무한 이기주의가 사라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디까지 자유일까? 우리는 이 ‘선’을 명확히 분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전쟁을 일으킬 자유도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 주장을 떠올리며 동시에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의 한 장면을 인용하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난 안락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을 원하고, 시를 원하고, 참된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그리고 선을 원합니다. 나는 죄악을 원합니다." "사실상 당신은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는 셈이군요." 무스타파 몬드가 말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야만인이 도전적으로 말했다. "나는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겠어요." "늙고 추악해지고 성 불능이 되는 권리와 매독과 암에 시달리는 권리와 먹을 것이 너무 없어서 고생하는 권리와 이투성이가 되는 권리와 내일은 어떻게 될지 끊임없이 걱정하면서 살아갈 권리와 장티푸스를 앓을 권리와 온갖 종류의 형언할 수 없는 고통으로 괴로워할 권리는 물론이겠고요."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런 것들을 모두 요구합니다."
  
야만인이 요구한 자유는 우리 선대가 일군 가장 기본적인 자유이다. 그리고 동시에 현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물론, 이미 수없이 일어났던 전쟁에 면죄부를 줄 수도 있다. 단순히 ‘폭력’은 나쁜 그것으로 생각하며, 전쟁 반대에 대해 얕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설득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무조건 자유를 허용하는 ‘자유 지상주의’ 그리고 ‘무정부주의’는 참된 자유가 될 수 없는 이유이다. 그러나 이 주장이 지나치게 의도를 확대하는 것이 아니냐 의문을 품을 수 있다는 데에도 일부 동의한다. 소셜 미디어와 인터넷의 발달로 사람들은 그릇된 정보를 쉬이 믿을 수도, 혹은 인터넷을 통해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양날의 검을 이용해 자유의 가치는 ‘정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에게 다른 방향으로 받아들여진다. “자유는 사랑받는 규율이다.”라는 말이 있듯, 자유 안에는 어느 정도 지켜야 하는 법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가 개인에게 어떤 형태로 소화되던 ‘올바른’ 그리고 ‘평화’의 키워드가 내재 되어야 한다.
인용한 소설의 배경처럼 현재 우리는 국가가 통제하지 않는다. 민주주의가 사라진 국가에서 국민 주권을 부르짖어야 할 필요도 없다. 현대의 개개인들이 비로소 자기 삶에 집중하게 된 것에는 토대에 ‘투쟁’이 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와 6.25를 거쳐 민주화까지 셀 수 없는 희생은 대한민국을 넓은 의미의 자유에 데려다 놓았다. 공동체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훌륭한 ‘공감’들을 상기하며, 순간 스스로가 수치스러워졌다. 편의를 위해 눈 감았던 사소한 일들이 마음 한쪽을 불편하게 만들며, 내 자유를 보장받으려 하면서도 다른 이들의 자유에는 관심 두지 않았다는 성찰을 하게 되었다. 이 글을 쓰는 개인에서 나아가 사회는 좁은 의미의 자유를 목표로 설정해야 한다. 누구도 굶지 않고 오로지 삶에 집중할 수 있는 사회. 그것이 완벽한 자유를 실현한 사회일 것이다. 선대의 희생을 이어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과제이다.

이 대회를 기회로 ‘자유’를 진지하게 고찰하였다. 그리고 전 지구적으로 나아가야 하는 방향을 제시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작은 움직임이 당장 큰 변화를 끌어내지는 못하겠으나, ‘나비효과’와 같이 언젠가는 닿을 거라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공동체적 가치, 평화 그 모든 것이 자유 실현의 일부분임을 모두가 알게 되는 세상을 바라고자 한다. 앞의 주장에 덧붙여 무조건적인 자유가 절대성일 수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 작게는 범죄들이 모두 공허할 뿐이라는 부분을 재확인하였다. 전쟁을 일으키는 진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꼭 해야만 하는 것인가? 중국 속담에는 이러한 말이 있다. “모기가 자기 뺨에 앉아야 비로소 폭력을 쓰지 않을 방법을 찾아낸다.” 더 이상의 희생은 불필요한 처사이며, 대화로 이겨낼 수 있는 길은 분명히 존재할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더 나은 국민, 더 나은 지구 공동체원으로 모두 성장할 수 있다. 완전한 자유는 가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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