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7주년, 이제는 반일·극일을 넘어 협일(協日)로 나아갈 때
남광규(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 통일과국제평화센터장)
시효 만료의 친일파 문제는 이제 청산해야
한국사회 내부에 역사적 상처로 자리 잡아 우리 스스로를 얽어매고 한일관계를 의도적으로 악화시키려 하는 것이 바로 친일파 문제다. 우선 일부 지식인과 폐쇄적 민족 사관에 갇혀 있는 학자들이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 친일파를 등용했고 대한민국이 시작부터 친일파가 득세했다고 하는 것’도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이승만 정부의 초대 내각 인사들은 대부분 독립운동 지도자나 일제에 저항한 인사들로 구성되어 있으나 오히려 북한의 김일성 내각은 대부분 친일 경력을 갖고 있었다. 해방 이후 친일파 청산문제도 그렇다. 1949년 <반민특위>에서는 688명의 인사들을 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해 200여 명이 기소당하고 그중 최남선, 이광수를 비롯해 저명한 인사들 40여 명이 사법적인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소위 친일파를 청산했다는 북한에서 친일파로 거명된 인사들은 300여의 무명 인사들이었고 실제 사법적 처벌을 받았다는 구체적인 내용도 없다.
그럼에도 2009년에 반민족행위에 친일을 더하여 친일반민족행위자가 1006명이 되었고, 2009년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서는 4389명으로 확대됐다. 그러다 보니 이제 친일파 문제는 대한민국을 파괴하고 자해하는 수단이 됐고 국내정치적 수단이 됐다. 무엇보다도 2차 대전을 일으킨 독일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20여 명이 처벌받았을 뿐이고, 일본도 도쿄전범재판을 통해 처벌을 받은 인사들이 25명 안팎에 그쳤다. 2차 대전의 가해자로 전범 국가들인 독일, 일본도 전후처리가 이러할진대 일제의 피해국인 우리가 반민족행위의 죄명으로 단죄하고도 현재까지 끊임없이 가공의 친일파를 양산하는 것은 매우 잘못됐고 이것은 북한의 반일전술에 이용당하는 것이다.
한일 정부 차원의 관계에 있어서도 한일관계는 김대중 정부 때 회복되다가 이후 악화되어 현재까지 한일 정부 간에 의미 있는 관계가 형성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2015년 한일 정부 간에 위안부 문제가 타결되어 한일관계가 정상화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으나 이후 대통령 탄핵사태와 문재인 정부에서 위안부합의가 파기되어 한일관계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여기에 더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등 과거사 문제를 제기하고 이에 대해 일본이 전략물자 수출규제 조치를 하고 이에 한국정부가 지소미아(GSOMIA, 군사정보보호협정) 종료 결정으로 대응하면서, 한일 간 갈등은 역사-경제-안보가 얽히는 복합 갈등으로 발전했다.
문제는 한일관계 재개의 가장 큰 난관이었던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향후 양국 정부 사이에 만약 재협상이 가능해도 당시 합의 내용보다 더 발전된 내용의 합의가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 그 사이에 몇 분의 할머니들이 돌아가셨고 현재 생존해 있는 몇 분 남지 않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연세도 대부분 90세 이상의 고령이기 때문에 우리 입장에서 위안부문제는 시급을 다투는 사안이다. 오히려 일본 정부는 손을 놓은 채 위안부 할머니들의 자연사를 기다릴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2021년 2월 문재인 정부가 ‘위안부-징용 배상금, 한국정부 선지급’ 검토 의사가 있음을 밝힌 것은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긍정적인 접근으로 볼 수 있었으나 이후 별다른 진전은 없는 상태다.
우리에게도 필요한 일본
물론 일본 내 역사 부정과 독도영토 주장에 대해서는 우리가 단호히 대응해 나가야 하겠지만 일본과의 경제적·안보적 협력은 필요하며 민간교류는 지속돼야 한다.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안보위협인 북핵문제 및 한·미·일 대북공조체제 강화를 위해서도 일본과의 협력은 중요하다. 한일 양국은 서로 군사동맹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한미-미일동맹을 매개로 긴밀히 연계돼 있다. 주한미군의 운영체계도 한반도 유사시에 한국·미국·일본 간에 한미연합사 및 주일미군사령부를 통해 긴밀한 군사방위협력이 이뤄지도록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미동맹을 기본 축으로 한반도의 안전을 지키는데 있어서 일본과의 협력은 현실적으로 불가피하다.
따라서 한미동맹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며 합리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라도 한일 간 안보협력의 가능성을 열어나가야 한다. 지금처럼 한미동맹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일동맹이 계속 확대되면 한국은 동북아 국제관계에서 소외될 수 있다. 한일 갈등이 심화되면 미국은 동북아에서 한일 양국 중 어느 한 국가를 선택해야 하는 외교적 딜레마에 처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한일 갈등의 심화가 동북아 지역 질서의 변화를 촉발하는 부정적 요인의 하나로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한미동맹은 물론이고 한일 양국은 아시아에서 자유민주주의체제와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아시아와 세계의 미래를 이끌어 나갈 주요 국가다. 그런데 양국이 과거에 갇혀 발전적 미래로 나가지 못하면 그것은 한일 양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나아가 국제사회에도 바람직하지 않다. 이와 관련해 현실적으로 일본의 보통 국가화와 군사 역할의 확대에 대한 냉정한 이해도 필요한데 국제사회에서 일본이 지닌 객관적인 역할과 영향력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일본과의 경제적·안보적 협력은 필요하며 시민사회 및 학생·문화교류도 지속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역사문제와 현재 외교안보에서 필요한 한일협력은 구분해서 대응해 나가는 ‘투 트랙 접근’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 급변하는 세계정세와 동북아에서 한국과 일본의 협력은 국제사회에 대한 공헌을 높여주는 시너지 효과를 창출해 국제사회가 필요로 하는 공공재를 제공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한·일 양국이 올바른 역사 인식의 바탕 위에 서로 이익이 되는 협력관계, 문화·인적교류 확대를 통해 서로 깊이 이해하는 관계, 국제무대에서 함께 협력하는 관계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
함께 가는 한일협력관계의 모색
그런 점에서 윤석열 정부가 외교정책에 있어서 한일관계 정상화를 주요 외교 목표로 설정한 것은 올바른 방향 설정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자유서방진영이 주도하는 인도·태평양 질서를 촉진하는 데 앞장설 것이라고 하면서 특히 한·미·일 3자 간 안보 공조를 강조한 바 있다. 이에 따라 새 정부 들어 일본과의 관계 회복과 북한에 대한 비상계획, 정보공유, 방위·억제력 등 한·미·일 3국 간 협력 개선을 위한 노력이 더욱 강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 부분은 미국도 적극적으로 바라는 바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3월 10일 당시 윤석열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가진 전화통화를 통해 한·미·일 3국의 대북정책 관련 긴밀한 조율이 중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바이든 행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한반도 문제는 물론 동아시아 정책에 걸쳐 한·미·일 3국의 협력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바이든 행정부는 2022년 2월 11일 공개한 인도-태평양 전략(Indo-Pacific Strategy) 보고서에서 인도-태평양 지역의 안보를 강화하기 위한 세부 내용에서 한·일 동맹국과의 확장억제 및 공조 강화가 필요하다고 명기했다. 일본의 기시다 총리도 윤석열 당선자와의 전화통화에서 19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구축된 양국 우호 협력관계의 토대를 바탕으로 한일관계를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기시다 총리의 발언을 볼 때, 과거사 문제들과 관련된 한일 간 현안들은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 시기 때 합의된 내용으로 해결되었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윤석열 정부가 생각하는 한일관계 개선에 있어서는 1998년의 ‘김대중-오부치 선언’의 협력 정신을 되살려 과거사 문제, 안보협력 등을 포함한 포괄적 해법을 추진하는 것이다.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으로 명명된 이 선언은 한일 간 전면적 교류·협력의 장전으로 정치·경제·안보·문화가 망라되어 있으며 43개 행동계획엔 개발도상국 원조 분야의 협력도 들어갔다.
주지하듯이 1948년 이후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하는 산업화, 개방과 국제화의 길을 선택해 발전과 번영을 이루었다. 앞으로 우리는 대한민국의 선진화와 통일, 한민족 시대의 도래를 추구하는 시대적 과제를 달성해야 한다. 약소국의 비애를 안고 살았던 한민족이 이제는 세계 모든 곳에 나가서 역량을 발휘하면서 한민족의 우수성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중견 국가로 국제적 책임과 의무를 담당하는 선도 국가로 발전하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문화, 스포츠 등 많은 분야에서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국가로 성장했다. 얼마 전 있었던 한미정상회담의 공동선언에도 담겨있듯이 한미동맹도 이전까지 미국에 의존하는 단계에서 점차 한국의 역할이 증대되고 미국도 도움을 구하는 방향으로 진화, 발전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한일관계에 있어서도 한국이 이미 일본을 능가하기 시작한 분야가 많고 그 추세가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구매력을 기준으로 하는 실질적인 국민소득에 있어서는 한국이 일본을 능가했다는 평가들이 많다. 이미 각종 문화 콘텐츠, 스포츠, IT 등에서 한국은 일본을 능가하며 국제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실력으로 일본을 능가하자는 극일이 현실 속에서 진행되고 있으며 미래는 한국이 일본을 능가해 동북아의 소프트 파워를 주도할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한일 양국이 과거에 얽매여서 발전적 미래로 나가지 못하면 그것은 한일 양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나아가 국제사회에도 바람직하지 않다.
광복 77주년을 맞아 반일과 극일을 넘어 이제는 한일관계가 함께 협력하고 발전하는 미래지향적인 관계로 변화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