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시기, 남북 유엔 통해 체제 경쟁 벌여

  • No : 2205
  • 작성자 : 한국자유총연맹
  • 작성일 : 2018-09-06 17:32:22
  • 분류 : 자유마당

냉전시기, 남북 유엔 통해 체제 경쟁 벌여
공산권 몰락과 경제성장으로 우리 위상 높아져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 중심의 국제질서의 재편은 새롭게 출범하는 신생국들의 출현과 함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념적 기준으로 미·소 양대진영으로 양립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특히 1945년 국제연합(UN: United Nations)의 탄생은 미·소의 경쟁 속에서 전지구촌의 보편적 가치를 가지고 각 국가들의 협력과 토론의 장을 여는 큰 의미를 가진다. 더욱이 1945년 일본의 항복 이후 한반도 문제에서 유엔은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고, 1948년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 UNTemporary Commission on Korea)의 감시 하에 유엔은 남한만의 총선거를 통해 대한민국의 국제적 정통성을 부여해 줬다.


또한 1950년 한국전쟁에서 유엔은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를 통해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유엔과 북한은 적대적 관계를 정립했다. 한국전쟁 중에 유엔은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 UN Commission for the Unification and Rehabilitation of Korea)을 설치하고 1973년 해체되기까지 유엔의 정치적 한국의 지지 상징기구로 삼았다. 결국 1953년 남북한의 정전협정 이후 유엔은 냉전시기 동안 한반도 문제를 다루는 직접적 외교의 장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냉전시기 유엔은 정치적으로 남한정부를 지지하면서도 국제정세의 변화 속에서 북한과의 관계를 단절시키지는 않았다.


결국 휴전이후냉전시기 동안 남북한은 유엔을 통해 체제 정통성 경쟁을 지속시켰으며, 남북 문제는 서구자유주의권과 동구사회주의권 경쟁의 대립구조와 그 결을 같이하고 있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체결 이후 한국정부는 유엔외교의 목적을 평화적 수단에 의한 대의제 정부형태의 통일·독립된 민주국가를 수립하고 국제 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데 두었다. 휴전 이후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의 연차보고서가 자동적으로 차기 유엔총회 의제에 포함됐기 때문에 한반도 문제는 매년 유엔총회의 토의내용이 됐다.


냉전시기 유엔외교는 체제 대결 중심 이뤄


이러한 과정에서 냉전시기, 1970년대 중반까지 남한의 유엔외교는 남북한 체제 대결이 그 중심에 있었다. 매년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서 정기적으로 토의하면서, 서방진영과 동구진영의 양대 회원국들의 남한 지지를 얻기 위한 득표전을 도모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유엔과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유엔의 권한에 대결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서두에 기술한 대로 유엔은 남한정부에게 국제적 체제 정통성을 부여했고 한국전쟁에서도 교전당사자였으며, 휴전 이후에도 UNCURK를 통해 남한정부를 정치적으로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은 자신이 배제된 유엔총회에서 한반도 문제 논의 자체를 부정했고 적대적 관계를 유지했다. 북한은 유엔 밖에서 유엔의 직권을 비판하면서 남한과의 체제 정통성 경쟁을 추구했다. 1957~1958년 미국을 중심으로 서방국가들이 남한의 유엔가입 안을 제출하자, 소련이 남북동시가입안을 수정 제출하기도 했는데, 이는 남북한 문제가 미·소 양대진영의 대립구조와 같이 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즉 북한은 유엔을 비판하면서도 소련을 중심으로 한국과 미국을 포함하는 서방진영의 반대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북한의 유엔 적대정책은 변화하는 세계정세를 반영해 조금씩 변화조짐을 보였다. 1950년대 말부터 제3세계의 비동맹 국가들이 대거 유엔에 가입하면서 반미정서가 형성됐고 이러한 변화는 유엔에서의 미국 지위를 약화시켰다. 이와 함께 1960년대 북한은 ‘다변화 외교’를 통해 사회주의권 국가들과 우호관계를 확대하기시작했다.



유엔의 제3세계 비동맹국가의 수적 증가는 미국과 한국의 전략적 수정을 낳았다. 1968년 한반도 문제를 매년 유엔총회에 회부되는 ‘자동상정방식’ 대신 UNCURK로 하여금 필요에 따라 연차보고서를 사무총장에게 직접 제출할 수 있게 하는 ‘재량상정방식’으로 전환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를 계기로 북한은 1960년대 말부터UNCURK 해체, 유엔사령부 해체, 외국군 철수 등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1971년에 대만 대신 중국이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면서 동구 사회주의권과 비동맹국가들의 유엔 내부의 세력 확대와 함께 유엔 내에서 북한의 입장을 확보하려는 공세적 입장으로 전환하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유엔의 남한과 미국의 압도적 지위는 유지되고 있었다.


1970년대 들어 중국이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고 유엔의 비동맹회원국 비율이 40%를 넘어서게 되면서 남한의 유엔외교 재조정이 불가피하게 됐다. 이러한 국제정세 변화는 북한의 적극적 유엔외교로의 전환을 불렀다. 1973년 북한은 남한과 남한 지지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비정부간 국제기구인 국제의원연맹(IPU)과 유엔전문기구인 세계보건기구(WHO)에 가입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유엔 옵서버 대표부를 뉴욕과 제네바에 설치하게 된다. 바야흐로 북한이 적극적으로 유엔외교에 나선 것이다.


이러한 북한의 유엔외교 변화에 따라 남한정부는 1973년 6월 23일 ‘6·23평화통일외교정책선언’을 발표하고 “북한의 국제기구 참여와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에 반대하지 않겠다”고 발표하면서 우리 정부의 유엔 외교정책의 전환을 시도했다. 이로써 북한의 유엔 내 진입과 함께 유엔에서의 남북대결 구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즉 한국은 북한의 적극적 유엔외교를 견제하면서 유엔에서 외교적 우위를 지키고자 했다. 동시에 남한은 ‘2국가 평화공존’을 제시하면서 유엔총회에서 표 대결 승리를 얻고자 노력한 것이다. 남북한의 적극적 유엔외교행보는 1973년 유엔총회에서 처음으로 남북한이 동시 참여해 한반도 문제를 토의하였고 표 대결 없이 ‘합의성명’을 도출했다. 그 내용은 UNCURK의 해체를 남한이 전향적으로 수용했고 북한은 유엔사령부 해체와 외국군 철수는 주장하지 않았다.


1974년부터 북한은 유엔사령부 해체와 외국군 철수 등의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서 공격적으로 다루었고 남북한의 유엔 대결 외교전으로 확대됐다. 1975년 ‘남북대화의 계속 촉구, 휴전협정 대안과 항구적 평화보장책 마련을 위한 협상개시’ 내용을 담은 남한 측 결의안(제3390A호)과 ‘유엔군사령부 무조건해체, 주한 외군의 철수, 휴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 대체 요구’를 담은 북한 측 결의안(제3390B호)이 동시에 채택되는 비정상적 행태를 보이면서 유엔에서 한반도 문제가 더 이상 논의되지 못했다.


이는 유엔에서의 한반도 정세 논의가 그 한계를 보여준 것으로 해석되며, 남북한은 더 이상 유엔에서의 대결구도가 소모전임을 인식한 것으로 풀이된다. 1976년부터 1991년 남북한 유엔동시가입 이전까지 유엔총회에서 한반도 문제와 관련한 결의안 대결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유엔 외부에서 남북한의 유엔 가입문제를 놓고 남북한의 대결구도는 지속됐다. 남한은 한국이유일한 합법정부라는 주장에서 한발 물러나 유엔단독가입을 포기하고 남북한 동시가입을 주도하면서 평화공존을 공식화하려는 입장이었다. 반대로 북한은 단일국호의 가입을 주장하면서 남한을 부정하고 체제대결 경쟁을 가속화 시켰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 이후 사회주의권 약화와 함께 남한의 경제적 급성장·국력신장은 유엔에서의 한국 위상이 북한보다 월등한 결과를 만들었다. 1988년 대북한 대결지양의 적극적 북방외교(1988년 7·7선언) 채택과 1988년 서울올림픽 성공적 개최는 유엔과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입지를 높였다.


80년대 후반 사회주의권 약화와 경제성장으로 유엔 내 한국 위상 높아져


냉전시기 동안 남북한의 유엔 외교는 국제사회로부터 지지를 확보하는데 주력했다. 냉전시기에 서구자유주의와 동구사회주의권 양대 진영의 팽팽한 경쟁구도에서, 유엔은 가장 정통성을 가진 국제기구로써 심판자 역할과 기능을 담당했다. 이 시기 남한은 유엔 외교를 중심으로 국제사회에서의 지지와 유엔 가입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1973년 까지 UNCURK의 역할을 중심으로 한반도 문제를 유엔총회에서 논의했다. 또한 1970년대 이후 비동맹회원국의 유엔 대거가입과 중국의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됨에 따라 미국의 입지력이 약화되고, 1973년 북한의 WHO 가입을 비롯한 적극적 유엔외교로 인해 한국은 유엔에서의 지위 확보를 위해 북한의 유엔가입을 허용하고 평화적 남북관계 개선을 주도하려고 노력했다.


냉전시기 유엔은 정치적으로 남한정부를 지지하면서도 국제정세의 변화 속에서 북한과의 관계를 단절시키지는 않았다. 결국 휴전이후 냉전시기 동안 남북한은 유엔을 통해 체제 정통성 경쟁을 지속시켰으며, 남북 문제는 서구자유주의권과 동구사회주의권 경쟁의 대립구조와 그 결을 같이하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냉전시기, 1970년대 중반까지 남한의 유엔외교는 남북한 체제 대결이 그 중심에 있었다.


북한 역시 반유엔 정책에서 1960년대 후반부터 적극적 유엔외교로 전환하면서 유엔 무대에서 남한과의 대결구도를 발전시켰으며, 한국과 미국의 유엔 주도 정책을 비판했다. 이러한 남북한의 유엔 외교 대결은 동구권의 몰락과 남한의 국제적 지위 확보, 냉전 이후 미국의 유엔 주도 등으로 남한이 주장한 유엔 남북동시가입으로 일단락됐다.


냉전 이후 시장경제의 확산과 글로벌화(globalization)는 다양한 비정부 행위자가 등장하게 했고 국제적 협력또한 필수불가결한 사안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유엔과 같은 국제기구의 역할과 기능은 주권국가의 개념을 넘어서고 있다. 이러한 국제질서의 변화는 한반도 문제 역시 다자적 접근인 국제기구로써 유엔의 역할과 기능은 여전히 중요하다. 현재 유엔의 한반도 문제 역할에 대한 회의적 의견도 있지만 북한의 핵문제 해결과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해 유엔은 정당성 있는 국제기구로서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냉전시기 유엔에서 남북한의 체제 경쟁적 대결구도는 이제 약화됐고, 유엔은 지금까지 북한의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해 적극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남북한은 이미 유엔에 가입되어 있으며, 한반도 문제 관련국들 역시 유엔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유엔은한반도 문제 관련국들의 대화채널로 활용될 수 있으며, 북한이 국제사회에 연착륙할 수 있도록 산하기구와 전문기구를 통해 지원하고 조정할 수 있는 역할을 담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해 한반도 문제 당사국의 직접적 대화와 협상은 중요한 사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종전선언과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유엔을 통한 다자적 접근도 매우 중요하다. 또한 ‘4·27판문점선언’과 ‘6·12북미정상합의문’ 이행을 위해 남·북·미가 적극적으로 협의해야 하겠지만 유엔은 한국전쟁의 교전당사자이며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적극적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즉 유엔이 한반도 평화를 위해 북한에게 ‘비핵화’를 설득하고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주선하여 북한이 국제사회에 순조롭게 편입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정부 또한 유엔이 적극적으로 한반도 ‘종전선언’과 ‘평화체제’ 구축에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적극적 유엔외교’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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