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군부 쿠데타와 짓밟힌 ‘미얀마의 봄’

  • No : 4235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21-03-03 13:49:37
  • 분류 : 자유마당

미얀마 군부 쿠데타와 짓밟힌 미얀마의 봄

예측불허 상황민주화 에너지 쏟아부어야 할 때

 

김근식(CBS 정치부장·대기자)

 

아웅산 수치의 민간정부 전복한 군부

민간·민주 정부를 수립한지 5년 만에 미얀마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지난 21일 민 아웅 흘라잉 최고사령관이 이끄는 군은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자 미얀마 민주화 투쟁의 상징인 아웅산 수치 고문 등을 구금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군부는 지난해 118일 치러진 총선에서 심각한 부정행위가 있었다며 쿠데타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쿠데타에 대한 시민들의 불복종 시위가 연일 확산되고 있고, 이를 진압하려는 군정의 대응 수위도 높아지면서 희생자가 나오는 등 정국이 혼미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국제 사회에서도 비판여론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군부는 1년간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다시 선거를 실시해 정권을 이양하겠다는 입장이다.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미얀마는 1962년 군 쿠데타에 의해 군사 정권이 들어섰지만 201511월 수치가 이끄는 민주주의 민족운동(NLD)이 총선에서 승리함으로써 50여년만에 문민정부가 탄생했다. 그리고 지난해 선거에서도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고 다시 승리했다.

이처럼 두 차례의 승리, 특히 최근 선거의 압승에도 불구하고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자 미얀마 국민들은 분노와 충격에 휩싸였다. 국제사회에서도 미스터리한 일로 받아들이는 시각이 많다. 하지만 미얀마를 오랫동안 통찰해온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라는 견해가 나온다.

아웅산 수치는 2015년 총선에서 NLD가 승리하면서 외교부 장관과 함께 국가 고문이라는 자리를 맡아 사실상 최고 지도자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가족이 외국인(남편 영국인)이면 대통령을 할 수 없다는 헌법 규정 때문에 불완전한 실권자였다. 민간 정부가 들어섰지만 군부는 군사 정권 당시 제정한 헌법에 따라 내무·국방·국경경비 등 핵심 3개 부처의 수장을 맡고 있는 등 막강한 권한을 유지해 왔다.

이는 미얀마가 2015년 군부의 그늘에서 벗어나 문민정부를 쟁취하는 과정에서 2008년 군사정부가 만든 기초헌법을 계승한다는 조건에 따른 것이었고 이것이 오늘의 쿠데타를 일으키는 결정적인 환경을 제공했다.

NLD는 지난해 총선에서 83%를 득표하며 압승했다. 반면 군부의 후원조직으로 결성된 연방단결발전당(USDA)은 상·하원에서 각각 4석을 잃으며 5년전 선거에 비해 더욱 위축됐다. 군부와의 힘의 균형을 깨고 민간 정부가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그러자 군은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며 공식 재검표를 요구하다가 이를 빌미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미얀마는 대통령을 국민투표(직선제)가 아닌 의회에서 간선으로 선출하는데, 군부는 국회 개원일에 맞춰 이번 쿠데타를 감행했다.

다시 말해 이번 쿠데타는 지난해 총선에서 문민 세력의 압도적 승리, 이에대해 오랜 세월 권력을 독점 및 분점해온 군부의 두려움이 반작용을 일으키며 발생했다.

하지만 총성 소리 하나 없이 이뤄진 이번 쿠데타는 미얀마의 역사, 미얀마 군부의 뿌리를 더 깊이 들여다봐야 이해할 수 있다.

우선 미얀마에서 군은 곧 미얀마의 역사라 할 수 있다. 군은 문민정부 아래서도 내무.국방.경비 등 3대 핵심 조직을 장악하는 것은 물론 군에게 25%의 국회 의석까지 할당돼 있는데, 여기에는 그만한 배경이 깔려 있다.

미얀마 군의 전신은 1943년 수치 국가고문의 부친이자 독립 영웅인 아웅산이 창설한 버마 독립군(BIA)이다. 버마 독립군은 1940년대 영국 식민지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은 물론 1948년의 정부 수립을 주도했다. 그리고 그 정통성을 기반으로 1962년 군부 쿠데타 이후 2015년 민주정부 수립까지 53년 동안 권력의 중앙에 서 있었다. 미얀마는 1824년 제1차 미얀마-영국 전쟁 패배 이후 1885년에 콘바웅 왕조(1752~1885)가 무너지며 영국 식민지가 된다. 그리고 1948년 독립까지 오랫동안 외세의 지배를 받았다.

 

수치의 불안한 리더십이 사태 키워

미얀마는 내부적으로 종족·지역·종교별로 급속히 분화된다. 특히 영국은 식민지 통치과정에서 인도에서 했던 것처럼 미얀마에서도 영국인을 정점으로 인도·중국인, 기독교로 개종한 미얀마인, 전통 불교 농민 등으로 차등화된 신분 사회를 구축했다. 미얀마의 식민지 지배 구조는 독립후 미얀마가 내부 결집을 통한 국가발전을 이루는 데 치명적인 걸림돌이 됐음은 물론이다.

어쨌든 피지배 과정에서 1930년대 이후 미얀마는 학생과 지식인이 주축이 돼 무장독립군 ‘30인의 동지등이 결성돼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독립 이후 정부 수립에도 주도세력이 됐다. 수치 고문의 아버지인 아웅산 장군(1915~1947), 미얀마 초대 총리를 지낸 우 누(1907~1995), 1962년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1981년까지 통치한 네 윈(1910~2002)까지 모두 ‘30인의 동지에서 독립 활동을 했다. 이같은 군의 역사는 거듭되는 미얀마 쿠데타의 뿌리 깊은 추동력이라 할 수 있다.

둘째로 미얀마에서 군과 민간은 악어와 악어새같은 관계다. 미얀마는 인구 5300만 명으로 버마인(68%)·샨인(9%)·카렌인(7%)·라카인인(4%)·몬인(2%)을 포함해 135개 민족·종족으로 이뤄진 다민족국가다. 불교를 믿으며 중국 티베트계 언어를 사용하는 최대 민족 버마인 이외 다수의 민족.종족들은 종교나 언어가 서로 다른 이질적인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독립 이후 끊임없는 내부 갈등, 독립 요구 등으로 내전 상태가 지속돼 왔다. 민간 정부를 이끄는 수치 고문도 소수민족 처리 문제에 전념해야 할 정도로 미얀마에서는 최대 현안이다.

그러다 보니 미얀마는 내란 평정과 치안 유지를 위해 독립 직후부터 많은 군사비를 지출하며 자연스럽게 군의 비대화를 가져왔다. 이같은 토양은 미얀마 군의 잇따른 쿠데타로 이어졌고 압도적 민심을 얻고 있는 민간 정부 아래서도 언제든 군부가 고개를 들 수 있게 만들었다. 미얀마는 세계 11위인 406000명의 병력을 갖고 있다. 동남아시아에선 베트남(482000) 다음으로 규모가 큰 군대를 보유할 만큼 군의 위상은 막강하다.

셋째로 소수민족 가운데 특히 로힝야족 사태는 미얀마를 더욱 딜레마의 수렁에 빠지게 했다. 이슬람을 믿는 로힝야는 미얀마 서부 방글라데시 지역으로부터 유입된 민족으로 미얀마의 주류인 버마족은 로힝야가 역사적인 소수민족이 아니라 불법 이민 집단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군부는 2017년 미얀마에 살고 있는 로힝야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 작전을 벌였다. 이로인해 140만명 로힝야족 중에서 75만 명이 난민으로 방글라데시로 피난을 가고, 학살과 강간 등이 자행되는 이른바 로힝야 사태를 빚었다.

그런데 노벨상 수상자인 수치 고문 조차 유권자 다수가 지지하는 로힝야 탄압쪽에 사실상 동조하면서 군과의 상호 의존적 관계를 유지했다. 민간정부가 로힝야와 관련해 국내 치안과 다수 민족인 버마인 등의 표심을 의식해 군부와 공생관계를 갖고 있으면서, 한편으로 권력을 놓고는 상호 경쟁해야 하는 모순적 구조를 보여온 게 미얀마의 속사정이다.

마지막으로 수치 고문의 정치력 부재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다. 2015년과 20202차례의 선거 승리에도 불구하고 군부와의 관계 재설정을 추진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지난해 총선 이전부터 쿠데타 얘기가 나왔지만 이를 수습하려는 시도나 이렇다할 움직임을 보여주지 못하고 결국 군부 정권을 다시 등장시켰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한국의 경우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이후 군의 사조직인 하나회를 과감하게 척결함으로써 군의 쿠데타를 사실상 원천 차단한 것과 비교된다. 덧붙여서 이백순 전 미얀마 대사가 “NLD는 공당(公黨)이 아닌, 수치의 사당(私黨)”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도 곱씹어봐야 한다. 그만큼 수치 고문이 민주화 역량의 외연을 확대하는 민주적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미얀마의 봄, 다시 올까?

종합하면 이번 쿠데타는 미얀마 역사와 함께 뿌리내린 군의 막강한 위상, 특히 로힝야 등 소수민족 대응에 따른 군의 권력 비대화, 다민족 국가의 운명적 갈등, 수치의 정치력 부재, 그리고 민주화의 짧은 연륜 등이 복합적으로 얽히며 오늘의 미얀마 사태를 초래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미얀마의 집안 사정을 잘 알고 있는 국제 사회의 대응도 속내가 복잡하다. 표면적으로는 쿠데타를 비난하고 구금 인사의 석방, 무력 진압 경고 등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지만 UN 등을 통한 강력한 제재나 단일대오의 모습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민주당 바이든 행정부가 미국내 자산 동결 등 군부 쿠데타 세력에 대한 제재를 얘기하고 있지만 미얀마가 국제사회로부터 오랫동안 고립주의를 유지해왔기 때문에 제재가 미칠 효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반면에 중국은 인도양 항구에서 시작해 미얀마를 관통해 자국 서남부 윈난성 쿤밍(昆明)으로 이어지는 석유·가스관을 건설 중이다. 또 오래전부터 미얀마 군부와 채널을 열어놓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태평양-인도양으로 이어지는 지정학적 요충지인 미얀마를 놓고 이미 세계적인 패권경쟁을 벌이는 미국과 중국이 섣불리 쿠데타와 민주화 사이에서 해법을 내놓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21세기 고도화된 세계화속에서도 미얀마의 봄은 미얀마 스스로가 열어가야 할 힘든 여정이 될 것 같다.

미얀마에서는 지금 학생과 시민, 그리고 공무원들까지 가세한 군정 반대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한국의 촛불집회를 롤 모델로 삼으려는 움직임도 엿보이고 있다. 반면 군부는 2만여명의 범죄자들을 가석방해 도시를 교란시켜 강경 진압의 명분을 삼는 등 예측불허의 상황이다.

군으로서는 가능한 수단을 모두 동원해 그동안 향유해온 것을 끝까지 빼앗기지 않으려 할 것이다. 반면 자유로움을 향해 가고자 하는 인간 본성은 총칼에도 끊임없이 도전해온 게 민주화를 꽃핀 나라들의 공통된 과정이다.

비록 5년여 짧은 기간 불완전한 수준이긴 했지만 문민정부를 경험한 미얀마는 이제 다른 앞서간 나라들이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민주화의 봄을 되찾고 궁극적으로 꽃까지 피워야하는 긴여정의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다시 미얀마의 봄이 찾아온다면 여름을 지나 가을까지 이르러 열매를 맺고 그것이 숙성되도록 민주화 에너지를 지속적으로 쏟아부어야 한다.

 

 

 

네티즌 의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