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유엔,대한민국을 승인하다 / 제성호 중앙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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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9-12-03 13:36:57
  • 분류 : 자유마당

[커버스토리]유엔,대한민국을 승인하다

제성호 중앙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1948년은 대한민국에겐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해였
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한 일련의 민주적 절차
가 진행됐다. 반면 북한은 이를 방해하고 파탄내기 위해
남한 내에서의 ‘전민항쟁’을 선전선동한 시기이기도 했
다. 대한민국은 이 같은 시련을 이겨내고 정부 수립을 대
내외에 선포했다. 그리고 유엔 총회는 같은 해 12월 12일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했다.
8·15 해방 이후 한반도 정세
제2차 세계대전 끝 무렵인 1945년 2월 미국, 영국, 소
련 3대 연합국 정상은 흑해 연안에 있는 얄타(Yalta)에서
회동했다. 회담에서 연합국 수뇌들은 ‘적당한 절차를 밟
아 한국을 해방·독립시키겠다’(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는 카이로선언(1943년 12월 1
일 채택)을 재확인했다. 얄타회담에서 미국은 소련에 대
해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할 것을 요청했고, 소련은 이를
수락했다.
또 양국은 이 회담 이후 일본군의 무장해제(항복 접수)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고, 1945년 7월 포츠담선언 채택
직후 최종적으로 북위 38도선을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한
관할권의 경계선으로 정했다. 즉 일본 대본영(大本營)군
은 미군이, 그리고 관동군은 소련군이 각각 무장해제를
하기로 한 것이다. 미국의 입장에서 38도선은 소련의 극
동지역 진출 및 한반도 남하를 막기 위한 마지노선의 성
격을 갖고 있었다.
이후 소련은 1945년 8월 9일 대일(對日) 선전포고를 하
고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다. 불과 며칠 후인 8월 15일 일
본이 연합국의 요구대로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2
차 대전은 완전히 끝났다. 미군과 소련군은 각각 38도선
의 남쪽과 북쪽에 진주해 군정(軍政)을 실시하기 시작했
다. 한반도가 분단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1945년 8·15 해방 때부터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
지의 3년간의 기간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진영 간에 냉전(冷
戰)이란 형식의 정치·군사적 대결이 가시화되던 시기였
다. 두 진영 간의 냉전으로 독일은 분단의 아픔을 겪었고,
그리스에서는 내전이 벌어졌다. 불행히도 한국은 분단과
전쟁을 모두 겪은 나라가 되었다.
해방 후 남한은 일본이 항복했으나 미군은 아직 진주하
지 않은 ‘힘의 공백 상태’가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공백을
선점한 것은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였다. 그 다음으로 세력을 결집한 것은 공산주의자
들이었다. 두 세력은 미군이 진주하기 전에 ‘조선인민공
화국’이라는 나라를 급조했다. 하지만 9월 8일 남한에 진
주한 미군은 조선인민공화국을 비롯한 그 어떤 조직도
인정하지 않았다.
미군이 진주한 후 우파 정치세력도 결집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한국민주당이었다. 해외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세력도 이 시기에 차례로 귀국했다. 미국에서
외교로 독립운동을 펼쳤던 이승만은 10월 16일 귀국해 독
립촉성중앙협의회를 결성했다. 중국에서 활동하던 대한
민국임시정부(이하 임정) 요인들은 1945년 11월과 12월에
나누어 귀국했다.
1945년 12월 말 모스크바로부터 한반도 신탁통치(信託
統治)안이 전해졌다. 카이로회담에서 연합국이 합의했던
‘적당한 절차를 밟아’라는 표현이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
영·소 3국 외무장관 회담에서 신탁통치 방식으로 구체화
된 것이다. 이 소식은 남한의 정치상황을 커다란 소용돌
이로 몰아넣었다. 임시정부, 한국민주당, 독립촉성중앙
협의회 등의 우파 정치세력은 즉각 반발하면서 반탁(反
託)을 결의했다.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등 좌파도 처음
에는 반탁에 동조했으나 곧 입장을 바꾸어 찬탁(贊託)으
로 돌아섰다.
이로 인해 남한과 북한의 정치세력은 처음부터 격렬하
게 대립했다. 뿐만 아니라 냉전에 들어간 미국과 소련 사
이에도 협력의 여지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특히 1946
년 3월 열린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예비회담은 동년 1
월에 개최)가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나고 같은 해 5월부터
무기한 휴회에 들어갔다. 이에 미군정은 온건한 중간파
세력으로서 김규식, 여운형 등이 중심이 된 좌우합작운
동을 지원했다.
한반도 문제의 유엔 이관과 대한민국 수립
하지만 현실적으로 중간파 세력이 크지 못한 상태에서
미군정의 지원만으로 합작운동이 성공하기는 어려웠다.
이런 가운데 1947년부터 동서냉전이 본격화하자 미국은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을 봉쇄하는 방향으로 한반도 정책
을 바꾸었다. 이에 따라 미군정이 지원했던 좌우합작운
동은 이내 추진력을 잃고 말았다.
2차 미·소 공동위원회 개최 무기 연기 등 한반도 문제
를 둘러싼 미·소 양국 간의 첨예한 의견 차이로 인해 동
사안은 1947년 9월 이후 유엔으로 이관되게 됐다. 미국과
소련이 ‘한국의 독립을 위한 절차’로서 임시민주주의 정
부 수립을 논의했으나,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공
전을 거듭하자 미국이 2차 대전에 참전했던 연합국 전
체로 구성된 유엔 총회에 회부해 다루기로 결정한 것이
다. 유엔 회원국들은 이 같은 논의를 압도적으로 지지하
는 한편, ‘한국의 독립문제’(the Problem of Independence of
Korea)라는 의제로 한반도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유엔 총회는 1947년 11월 14일 한반도에
서 인구비례에 따른 총선거를 실시해 통일정부를 수립하
며, 이 선거를 감시하기 위해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파
견하기로 결의했다. 이 총회 결의 제112(II)호가 바로 그
것이었다.
이에 따라 1948년 1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남한에
들어왔다. 하지만 소련의 거부로 북한에는 들어갈 수 없
었다. 결국 그해 2월 유엔은 ‘선거감시가 가능한 지역’, 즉
남한에서만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남한에서는 ①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공정한 선
거 관리와 감시 하에 1948년 5월 10일 제헌 국회의원 총선
거(보통·평등·직접·비밀 선거) 실시, ② 5월 31일 국회 구
성(198명) 및 개원, ③ 7월 17일 헌법 제정·공포, ④ 7월 24
일 초대 대통령 선출, ⑤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공
포의 수순을 밟아 신생 대한민국이 출범했다. 이는 한반
도에서 최초로 국민국가의 건설, 곧 공화국의 출범을 국
제사회에 알리는 순간이었다.
반면 북한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통일 민주정부 수
립) 권능을 부정하는 한편 이들의 38도선 이북 출입 및 활
동을 불허했다. 이후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
공화국’이라는 이름의 별개의 ‘국가’를 북한지역에 수립
했다고 발표했다.
1948년 유엔 총회 결의 제195(III)호의 의미
한반도에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등
장하면서 이들의 법적 지위를 결정해야 하는 어려운 문
제가 발생했다. 이 같은 난제에 대하여 유엔 총회가 유
권적 결정을 내렸다. 그것이 바로 1948년 12월 12일 48대
6(기권1)의 압도적인 다수로 채택된 유엔 총회 결의 제
195(III)호이다. 동 결의의 제2항은 “한반도의 유엔한국임
시위원단이 감시하고 협의할 수 있었고 전체 한국민의
절대다수가 거주하는 지역에 하나의 합법정부(대한민국)
가 수립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결의는 또 “(대한민국이)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감
시 하에 한반도 해당 지역의 유권자들의 자유로운 의지
가 정당하게 표현된 선거를 통해 수립되었다”면서, 따라
서 “이 정부는 한반도에 존재하는 유일한 그러한 (합법적
인) 정부(This is the only such government in Korea)”라고 천
명했다.
총회 결의 제195(III)호의 역사적 의의는 한반도에 이미
존재하는 복수의 ‘정부’ 가운데서 “대한민국(정부)만이 유
일한 합법정부”라는 유엔의 선택적 입장을 천명한 데 있
다. ‘대한민국=한반도 내 유일합법정부’ 승인은 대한민국
의 (Korea) 단독대표권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북한 정권의
합법성 및 정통성을 부인하는 논리로 귀결된다. 곧 북한
은 한반도 내에서 ‘지방정부’ 혹은 ‘사실상의 당국’에 지나
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와 관련해서 총회 결의는 “공정한 자유선거가
한반도의 다른 부분, 즉 북한지역에서는 실시되지 않았
다”는 점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이 결의의 핵심 내용은
‘한국의 독립문제’라는 명칭의 1949년 10월 21일자 유엔
총회 결의 제293(Ⅳ)호에서 재확인됐다.
‘대한민국=유일합법정부’, ‘북한=지방정부 또는 사실
상의 당국’이라는 입장은 1950년 6·25전쟁 발생 직후 유
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채택한 결의 제82호, 제83호 및 제
84호에서 잘 드러났다. 이들 결의에서는 대한민국을 ‘The
Republic of Korea’, 그리고 북한을 ‘The authorities in North
Korea’으로 표기했다. 대한민국은 유엔의 승인 이후 미국
을 비롯한 자유 우방 50여 개국으로부터 승인받음으로써
그 정통성을 보다 확고히 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 수립은 ‘건국혁명’” 주장도
반면 유엔은 무력남침을 개시한 북한에 대해 ‘평화의
파괴자’ 혹은 침략자로 규정하고, 대한민국과 자유민주주
의 체제 수호를 위해 16개국을 파견, 북한군을 격퇴시킴
으로써 북한 정권의 비정통성을 국제적으로 확인시켜 주
었다.
대한민국의 수립과 유엔 총회의 유일합법정부 승인은
북한 공산집단을 포함한 국제 공산진영과의 치열한 ‘자유
민주투쟁’의 산물이었다. 혹자는 이를 두고 ‘건국혁명’이
라고까지 말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유엔이 지대한 역
할을 했다. 유엔은 6·25전쟁 시 누란의 위기에 처한 대한
민국을 지켜주는 역할도 했다.
우리는 이처럼 소중한 대한민국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발전시킬 책임이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 주도의 자유민
주통일을 준비해야 한다. 나아가 세계평화를 위한 응분
의 기여도 해야 한다. 이것이 대한민국 헌법의 정신이자
애국선혈의 뜻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산파
역할을 했던 유엔의 지원에 보답하는 길이 아닐까 생각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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