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분석]한일청구권협정, 독이됐나, 약이됐나 (최익재 중앙일보 기자)

  • No : 2631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9-09-02 17:49:12
  • 분류 : 자유마당


한국과 일본의 대결 국면이 좀처
럼 진정되지 않고 있다. 일제 강
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배상 문제가 동
북아 정세 지형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본의 금수조치 공세에 맞서
한국 정부가 내놓은 카드는 한일군사
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이
다. 안보 문제까지 전선이 확대된 분
위기다. 북·중·러를 견제해 온 한·미·
일 공조에 자칫 틈이 벌어질 수 있다
는 우려가 나온다. 이번 사태의 발단
이 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의
핵심은 1965년 한일기본조약의 부속
협정으로 체결된 청구권 협정을 어떻
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와 관련 일본 정부는 청구권 협
정 체결로 징용 피해자 보상이 마무리
됐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반
면 한국 측은 보상은 끝났을지라도 배
상은 남아 있는 상태라고 주장하고 있
다. 배상 책임을 부인한 일본 법원의
판결은 국내에서 효력이 없으며, 또
배상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과 별
개의 사안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갈등의 불씨가 된 한일 청구권 협정은 잘못된 협정일까? 일각
에선 청구권 협정이 포함돼 있는 1965
년 한일기본조약 자체를 폄하하는 분
위기도 있다.
하지만 이를 파기하고 일본과 새로
운 조약 또는 협정을 맺는 것은 불가
능한 일이다. 일본 정부가 응하지 않
을뿐더러 이미 기존 조약과 협정에
따라 실행됐던 조치들을 되돌리는 절
차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번 갈등
사태의 핵심인 청구권 협정 체결 과
정과 상황을 재조명해 보자.
해방 직후 적산 몰수 주체는
한국 아닌 미 군정
‘65년 체제’의 골자인 한일 청구권
협정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선 해방 이후 한반도 상황에 대한 정
확한 인식이 우선돼야 한다. 특히 미
군정이 남한에서 어떤 역할을 했고,
한국 정부와는 어떤 관계를 설정했는
가에 대한 파악이 필요하다. 이에 근
거해 일제 강점에 따른 피해와 전후
보상 문제가 처리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해방 직후 한국
정부는 주도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
따라서 한국에 남겨졌던 재한 일본
인들의 재산에 대한 몰수 주체도 한
국 정부가 아닌 미 군정이었다. 한국
에겐 재한 일본인들의 재산을 몰수할
권한이 없다는 것이 미 군정과 국제
사회의 판단이었다. 한국의 대 일본
관계가 교전국이 아닌 식민지였다는
이유에서였다.
미 군정청은 해방 직후 일본인이 남
겨둔 한국 내 재산을 귀속시키는 조
치를 발표했다. 1945년 12월 아치볼
드 아놀드(Archibald V. Arnold) 군정
장관은 기자회견을 열고 “한국에서는
배상 관련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한반
도는 일본의 영토였지만 전쟁 피해가
없었기 때문에 배상 근거가 존재하는
지 알 수 없다”고 밝혔다. 또 에드윈
폴리(Edwin W. Pauley) 대일 배상정책
특사는 “한반도에 남겨진 일본인 재
산은 한국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연합국 배상에 쓰일 것”이라
고 말했다. 한국 정부가 재한 일본인
재산을 ‘적산(敵産) 몰수’ 대상으로 정
하고, 일부를 임의대로 몰수하긴 했지
만 이는 공인받은 행위가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한국 정부는 연합국
대일배상회의 참가를 강력히 희망했
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에 한
국 정부는 자체적으로 일본에 대한
배상 요구를 준비할 수밖에 없는 상
황에 몰리게 된다. 1948년 1월 조선은
행이 만든 ‘대일배상 요구의 정당성’
이라는 문서도 이런 조치들 중 하나
였다. 이 문서는 나중에 한일 협상 때
한국 측 요구 사항의 기본 틀로 활용
됐다.
냉전체제 강화로
미국의 대일 정책 바뀌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1949
년 중국이 공산화되고 6·25 전쟁이 발
발하자 동북아에서의 냉전 체제는 더
욱 고착화된다. 국제 환경의 변화에
따라 미국의 일본에 대한 정책도 바뀐다. 사회 개혁을 통해 일본을 민주
화시키겠다는 미국의 정책 방향은 일
본을 재건해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전
진기지로 키우겠다는 전략으로 선회
했다. 일본에 대해 2차 세계대전에 대
한 책임을 묻기보다는 ‘반공의 첨병’
역할을 부여한 것이다.
미국 주도로 1951년 체결된 샌프란
시스코 평화조약은 이 같은 일본의
역할 변화를 적극 반영함으로써 올바
른 전후 처리에 대한 한계를 예고하
게 된다. 이 조약에는 일본을 포함해
49개국이 서명했다.
한국 전승국서 빠져
일본의 ‘배상’ 받지 못해
한국의 경우 연합국의 대일배상회
의 격인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참
여하지 못하게 된다. 대만과 함께 ‘분
리지역’으로 규정됐기 때문이다. 이
조약에 서명한 필리핀,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등과 같이 일본에 항전했거
나 항전국의 지배를 받았던 나라가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한반도는 단지
일본의 식민지였다가 분리된, 독립된
지역이라는 의미다.
이에 따라 한국은 샌프란시스코 평
화조약 제14조에 따른 배상을 받지 못
했다. 대신 제4조에 따라 청구권 협정
을 맺게 된다. 배상은 불법행위에 대
한 회복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반
면, 청구권의 경우 단지 상호간 청산
하지 못한 채권이나 자산 등에 대해
상대방에게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뜻한다. 따라서 한일 청구권 협정은
본질적으로 일본의 불법행위에 대해
명확히 규정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한
성격을 갖지 못했다.
따라서 14년간의 협상 끝에 우리가
받아낸 무상 3억 달러와 유상 2억 달
러는 양국이 상대방에 갖고 있는 재
산권과 채권 등을 소멸시키는 포괄
적인 합의를 위한 자금으로 볼 수 있
다. 그 명칭을 ‘한일 청구권·경제협
력 협정’이라고 한 것도 이 같은 이유
에서다.
그 내용은 이렇다. 청구권 협정 제
1조는 일본이 한국에게 10년 간 무상
으로 3억 달러를, 차관으로 2억 달러
를 제공하는 것을 담고 있다. 제2조는 양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이익,
청구권에 관한 문제를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한다고 했다. 일본이
한국에 주는 돈의 성격에 대한 명확
한 규정은 없었다. 한일 양국 정부가
협정을 타결하기 위해 자의적인 해석
을 바탕으로 절충선을 만들어 적당한
선에서 타협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
는 대목이다.
‘반공’ 앞세워 한일 관계 개선
나선 박정희 정권
한일 협정 타협까지는 무려 14년이
걸렸다. 한일 양측이 미국의 주선으
로 회담장에서 처음으로 마주한 것은
1951년 10월이었다. 이승만 정권 때
지지부진하던 한일 협상은 박정희 정
권의 등장으로 급물살을 타게 된다.
박정희 정권은 쿠데타 직후부터 한일
관계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여기
에는 당시 박정희 정권이 직면한 몇
가지 대내외적인 압박이 있었다.
첫째, 미국의 지속적인 원조가 필
요했고, 이를 위해선 반공의 전초기
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했다.
둘째, 경제발전을 통해 쿠데타에
대한 명분을 쌓기가 필요했다.
셋째, 경제발전을 위한 외자 도
입이 절실했다. 넷째, 공산세력 견
제를 위해 미국이 한일관계 개선을
원했다.
이 같은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박
정희 대통령은 1964년 1월 연두교서
를 통해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적극적으로 협상에 나서겠다고 밝혔
다. 당시 그가 내건 가장 큰 명분은
자유반공 진영의 연대 강화였다. 북
한이 소련과의 유대를 강화하고 중공
(현재의 중국)의 성장으로 동북아 정
세가 한국에게 불리하게 돌아갈 수
있음을 지적하고 일본과의 결속 강화
를 통해 이에 맞서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안보 논리를 통해 국내의 반일
감정을 억누르고 한일 협정 체결을
추진한 것이다.
한일 양국서 ‘저자세 외교’라며
반대 목소리도 거세
당시 한일 협정 체결과 관련해 한
국과 일본에선 반대의 목소리가 컸
다. 특히 한국에서는 일본에 대한 저자세 외교라는 비판이 일었다. 학생층
을 비롯해 야당과 어민 등이 나서 박정
희 정권의 퇴진까지 요구하기에 이르
렀다. 과거사 청산이 전제되지 않은 정
치적 타협이라는 것이 반대파들의 주
장이었다.
한일 청구권 협정은 냉전시대
역사적 산물
1964년부터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내
기 시작한 이들은 합당한 청구권 요구
와 평화선(이승만 라인) 수호를 요구했
다. 평화선은 이승만 대통령이 1952년
1월 우리 연안 해역의 수산물 보호를
위해 내린 조치로 사실상 우수한 장비
와 기술을 갖춘 일본 어선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한일 협
정 반대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1964년
3월엔 ‘대일 굴욕외교 반대 전 국민 투
쟁위원회’가 결성되고 이후 대학생들
을 중심으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기
도 했다.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협정 반대
운동이 있었다. 하지만 한국과 비교했
을 때 상대적으로 격렬하지 않았다. 전
국민적 성격도 아니었다. 사회당과 공
산당 등이 중심이 된 반대파들은 주로
정치와 군사적인 이유로 내세웠다. 이
들은 한일 협정이 군사적 동맹 성격을
띠고 있으며 미국의 대 중공 정책을 보
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일 협정이 중공 봉쇄를 위한 양국 간
협력의 발판이 될 것이고, 일본은 단지
미국의 이 같은 봉쇄 정책을 위한 전진
기지가 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결론적으로 1965년 한일 협정은 냉
전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미국의
공산주의 견제를 위한 글로벌 전략의
일환이었다는 얘기다.
중국의 공산화, 소련의 팽창 등이 동
북아에서의 냉전을 악화시켰고 이에
대한 대처에 시급했던 미국이 한일 협
정의 기초가 된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전후 처리가 아닌 공산주
의 대항마로 활용한 것이다. 독일의 사
례처럼 철저한 전후 처리가 실행되지
못한 것도 이 같은 동북아에서의 국제
정치적 환경 변화에 기인한다.
그 틈새에 있었던 한국은 제 목소리
를 낼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북한
과 대치하면서 안보에 위협을 받고 있
는 세계 최빈국 중 하나에 불과했기 때
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경제 발전과 안
보 논리를 앞세워 한일 협정을 체결했
고, 따라서 과거사 청산은 후순위로 밀
릴 수밖에 없었다.
한일 협정이 체결된 지 54년이 지난
지금, 일본과의 관계가 상당히 불편해
진 상황에서 협정과 관련해 여러 사후
평가가 나온다.
특히 한일 협정에서 일본의 불법 행
위를 규정하는 ‘배상’이란 단어가 빠졌
다는 것에 대해 잘못을 따지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국력이 초라했던 당시 우
리의 선택지는 극히 제한적이었다는
것을 부인하긴 어렵다. 특히 후대에까
지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
무엇이었느냐에 대해 자신 있게 단언
하기는 더욱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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