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일제 식민 해방과 북 남침 저지

  • No : 2204
  • 작성자 : 한국자유총연맹
  • 작성일 : 2018-09-06 17:06:33
  • 분류 : 자유마당



유엔, 일제 식민 해방과 북 남침 저지
유엔참전용사들의 희생 잊지 말아야



얄타회담으로 유엔과 인연 시작
미·영·중·소 신탁통치 후 독립 합의


오늘날의 유엔은 1944년 미국 워싱턴 교외 덤버턴 오크스 별장에서 미국·영국·중국·소련 대표가 세계 평화를 위한 기구를 제안, 이에 따른 헌장을 기초하기 위해 1945년 50여 개국이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참여해 창설됐다. 이를 통해 유엔헌장과 안전보장이사회, 총회 등 6개의 주요 기관이 만들어졌다. 안보리는 국제평화와 안전의 유지를 책임지고 총회에 앞서 분쟁 문제, 유엔가입 문제 등을 다루는 중심 기구이다. 유엔은 세력균형이나 동맹체제와 같은 전통적 방법이 아닌 조정이나 중재를 통한 국제분쟁을 해결하려는 의도로 설립했다. 안보리 이사국은 15개국으로 그중미국, 영국, 소련, 프랑스, 중국은 상임이사국으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게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유엔 구호재건위원회가 세워져 해방된 국가들에 대한 대규모 구호활동에 나섰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후 참혹한 전화를 입은 인류를 구하고 국제 우호관계의 촉진 및 경제, 사회, 문화, 인권 문제 등에 관한 국제협력을 위해 세계 평화기구로서 역할을 해왔다. 1945년 10월 24일 가맹국 51개국으로 발족한 유엔은 오늘날 193개 회원국이 됐고 일류의 복지와 평화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이던 1945년 2월 얄타에서 개최된 미국·영국·소련 등 3개국의 정상회담에서 유엔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회담결과 일본이 항복한 후 한반도는 미국·영국·중국·소련 등 4개국에 의한 일정 기간의 신탁통치를 거친 후 독립시키기로 합의가 됐는데 이것이 우리와 유엔과의 관계의 시작이다.


문제는 참전을 계속 지연시켜온 소련이 미국이 히로시마에 사상 최초의 원자폭탄을 투하한 지 2일 후인 1945년 8월 8일 대일선전포고와 더불어 참전했다는 점이다. 당시 미군은 오키나와와 괌 일대에 주둔하고 있어 소련이 한반도 전역을 점령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북위 38˚선을 미군과 소련군의 경계선으로 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소련이 이 제의를 받아들여 한반도는 북위 38˚선을 경계로 미군과 소련군에 의한 분할 점령하의 분단국가가 됐다.


분할 점령시 자유민주진영의 주도국가인 미국은 북위 38˚선을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한 잠정적인 것으로 설정한 반면,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은 북위 38˚선을 정치적인 경계선으로 항구화시켜 북쪽을 소비에트화 하려 했다는 점에서 동상이몽이었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양 국가는 2차대전의 승전국인 연합국가(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소련)로서 세계평화를 위한 유엔의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함께 됐다. 유엔창설 이후 한반도 문제를 비롯한 세계 평화와 안보문제에서 미국과 소련은 대립된 시각을 갖게 됐다. 이 대립은 냉전시기를 거쳐 1989년 소련붕괴까지 유엔의 평화기능에 상당한 난제를 던져주는 아이러니를 만들었지만 어찌됐든 한국의 건립에서 유엔의 역할은 지대한 것이었다.


1948년 유엔감시하 남한지역만 선거 실시 대한민국정부 탄생


1945년 일제의 식민지국가를 청산하고 해방된 우리나라는 분단국가로서 1948년 12월 12일에 국제적인 승인을 얻었다. 그리고 3회에 걸쳐 유엔에 가입을 청원했지만 소련의 거부권 남용으로 가입이 거부됐다.


미·소 양국은 한반도의 당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46년 3월과 1947년 5월 서울에서 회의를 개최했지만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결국 한반도문제는 1947년 9월 유엔으로 이관됐다. 유엔에서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을 구성하고 제2차 총회에서 통일된 한국정부 수립을 위해 1948년 5월 31일까지 한반도 전역에서 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하고 UNTCOK가 선거감시임무를 맡도록 했다. UNTCOK는 유엔결의에 따라 1948년 1월 한반도에 도착했으나 북한지역에는 소련의 거부로 들어가지 못했다. 때문에 유엔총회의 결의실현은 불가능하게 됐다.


결국 유엔은 1948년 5월 31일 감시가 가능한 미군 점령하의 남한지역에서만 선거를 실시했고 의회를 구성해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1948년 8월 15일 독립을 선포함으로써 유엔이 인정하는 한반도에서의 유일 합법정부인 대한민국정부가 탄생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바로 유엔에 의해 탄생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유엔의 감시하에 대한민국정부가 구성되자 소련은 8월 25일 38˚선 이북지역에서 1948년 9월 9일 이른바 국제적인 정통성이 없는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공산정권을 선포했다.


사실상 소련은 북한에 진주한 45년 10월 직후부터 공산주의에 입각해 조직적으로 북한의 군사력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스탈린의 꼭두각시인 김일성은 1949년 3월 소련을 방문해 조·소경제문화협정을 체결했고, 소련과 중국은 1950년 2월 우호동맹 및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북한은 소련과 중국 양 후원국으로부터 원조를 얻게 됐다. 게다가 유엔 상임이사국인 소련은 유엔의 평화의지와는 정반대되는 전쟁침략 작업을 김일성과 함께 물밑에서 진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1948년부터 미군 철수가 시작됐다. 미군 철수로 한반도의 남북한간 군사력 균형은 붕괴되기 시작했고 북한의 침략야욕에 유리한 상황이 조성됐다.


그리고 1950년 1월 12일 워싱턴에서 애치슨 미국 국무장관은 극동에서의 미국 방어선은 한반도를 배제한다는 공표를 함에 따라 미국이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개입하지 않을 소지를 남겼다. 북한은 세계평화를 위한 국제기구인 유엔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폭풍’이라는 작전명으로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대한민국을 기습 남침해 6·25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발발했다. 6·25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종결과 함께 전개된 미소냉전 구도가 열전으로 폭발하게 된 최초의 전쟁이며 유엔이 최초로 분쟁지역에 유엔군을 파견한 첫 번째 전쟁이기도 했다. 유엔군은 사활을 걸고 6·25전쟁에서 세계 평화를 위해 핵심적인 역할을 펼쳤다.


UN, 6·25전쟁 남침으로 규정

최초로 분쟁지역 유엔군 파견


김일성은 계획한대로 기습 공격과 우월한 화력을 앞세워 남쪽으로 계속 진격했다. 반면 한국 정부는 애초 휴일인 6월 25일 새벽에 북한군이 쳐들어온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 기습침략에 대비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당시 유엔을 사실상 주도한 미국의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미주리주의 저택에서 휴식 중이었고 러스크 차관보, 페이스 육군 장관, 애치슨 국무장관, 존슨 국방장관, 합참의장 등 주요 지휘라인도 부재중이었다. 이것은 당시 미국과 유엔이 북한의 침입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는증거도 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의 대응은 매우 신속했다. 보고를 받은 트루먼 대통령은 공산주의의 침공을 지금 차단하지 않으면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큰 희생을 치르기 전에 지원군을 투입해 북한의 야욕을 막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트루먼은 6월 25일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을 공격했고 독립국가들을 정복하기 위해 군사력을 사용하려 한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줬으며 북한의 남침은 명백한 유엔헌장 위반이고 평화를 침해한 것이며 이 도전에 정면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당시 한국은 유엔 회원국이 아니었지만 북한군의 불법남침이 유엔의 기본정신에 위배되어 유엔의 한국전 참전이 가능하게 됐다. 소련을 제외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미국의 결의안을 찬성 9대 기권 1표로 가결했다. 유엔은 김일성에게 불법으로 남침한 것이기 때문에 38선 이북으로 즉각 원대 복귀할 것을 요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세계 평화와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유엔군이 참전해 북한군을 응징하겠다고 했다.


서울함락 후인 1950년 6월 28일(한국시간 29일) 17시 국가안보회의 직전에 미국의 한국에 대한 군사적 개입은 유엔의 경찰행위이며 한국에서 미국의 행동은 기습공격을 유엔이 격퇴시키는 것을 도우려는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유엔안보리는 북한군의 불법남침에 대해 한국전쟁 참전을 결의해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뉴질랜드, 네덜란드 등 16개국이 군사적 지원을 했고, 5개국이 의료지원을, 그리고 42개국이 물자지원을 했다. 총 63개국이 6·25전쟁에 참전하거나 관여했다.


당시 한국은 전쟁발발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빼앗기고 불과 두 달도 되지 않아 낙동강평화벨트로 방어지역(경상도 일부와 부산)을 제외한 남한의 전 지역을 북한군에게 점령당했다. 그러나 유엔군은 1950년 9월 15일 한반도의 공산화라는 위기에서 맥아더 유엔사령관에 의한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전세를 역전해 서울수복과 압록강 진격을 이뤘다. 당시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의 인천상륙작전은 6·25전쟁의 전세를 확 전환시킨 것으로 유엔의 전쟁에서의 지대한 역할이 한국인의 기억속에 영원히 남았다.


자유와 평화 위해 희생한 유엔군 참전용사 은혜 잊지 말아야


이후 유엔군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2~3년간 일진일퇴를 거듭한 끝에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마침내 휴전협정에 조인했다. 현재 7월 27일은 2013년부터는 ‘유엔군 참전의 날’로 지정돼 기념돼고 있다.


200여만 명의 유엔참전용사 중 180여 만 명이 미국 젊은이였다. 잘 알지도 못하는 이역만리의 한국 땅에 수많은 유엔참전용사가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지원했고 그 중 4만 7천여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수많은 용사들이 실종되거나 부상을 입었다. 6·25전쟁은 가장 많은 나라가 단일 연합국으로 참전한 전쟁으로 기네스북에 기록될 정도이다.


우리나라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젊은 목숨을 바쳤던 유엔군 참전용사들의 뜻 깊은 희생과 은혜를 한국인은 영원히 잊지말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전세계 유일한 유엔평화공원이 부산에 있다. 부산 유엔평화공원에는 2300여 기의 참전용사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유엔참전 용사들 덕분에 전쟁의 어둠이 남아 있던 후진국에서 평화의 빛을 발하는 선진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유엔참전국 참전용사들에게 감사함을 표하기 위해 유엔군 참전용사 및 후손 방한행사가 계속 되고 있다. 특히 매년 11월 11일 오전 11시(1111 Turn Toward Busan)에는 부산UN 평화공원에 모셔진 참전용사를 향한 감사의 경례를 하는 기념행사도 계속되고 있다. 대한민국은 향후 보훈외교와 유엔외교의 투트랙 전략을 통해 은혜를 갚아야 한다. 우리는 과거사에 있어 일본과는 전혀 달라야한다.


적어도 빚을 졌으면 반드시 갚는다. 은혜를 입었으면 반드시 갚는다. 역사를 잃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과거에 잘못했으면 반드시 사과한다. 이것이 미래의 글로벌 문화선진국으로서 우리의 자세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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