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체제 69년… 세습독재-도발로 파탄의 길

  • No : 1783
  • 작성자 : 한국자유총연맹
  • 작성일 : 2017-09-01 14:57:12
  • 분류 : 자유마당

북한 체제 69년…
세습독재-도발로 파탄의 길
주체사상 수령론 바탕한 폐쇄주의로 후진화 가속
김용삼 |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기획실장


북한 헌법은 스탈린 헌법을 참고해 모스크바의 법률 전문가들이 만들었으며 국가를 건설하는 회의에 북한 측 대표가 아무도 참석하지 않고 소련 지도부가 일방적으로 결정했다. 이는 북한이 완벽한 ‘스탈린과 소련공산당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사진은 2001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창건 53돐 기념 중앙보고대회 전경

한국사회를 좌회전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학자들은 해방 후 북한을 “혁명적인 소련군의 지원 하에 혁명적 공산주의자와 혁명적 민중이 연합한 정권으로서 미제(美帝)와 반(反)민족·반(反)혁명 세력의 지배하에 있는 남한을 해방시킬 민주기지였다”고 주장한다.
《해방전후사의 인식》 제4권의 총론 격인 최장집·정해구가 쓴 〈해방 8년사의 총체적 인식〉이란 논문이 이런 시각을 대표한다. 같은 책 제5권의 총론 격인 〈해방 전후 북한 현대사의 재인식〉에서 김남식은 북한을 반제(反帝)반봉건 민주주의혁명에서 사회주의혁명으로 나아가는 혁명국가라고 정의했다. 이러한 북한의 역사와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체사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 세 학자들의 이론적 근거는 모택동의 신민주주의 혁명론적 시각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불행하게도 북한의 실상은 그들의 주장과는 크게 다르다. 1945년 8월 26일 소련군이 평양에 입성한 이후 북한 현대사는 소련군과 소련공산당, 그리고 당 중앙인 스탈린의 지시와 조종에 의해 건설된 완벽한 공산 위성국가였다.
북한의 수상 자리에 오른 김성주는 소련군 88특별정찰여단 소속이었다. 김성주는 9월 초 당 중앙의 부름을 받고 하바로프스크에서 모스크바로 날아갔다. 스탈린은 크렘린 궁 별장에서 김성주를 4시간 동안 면접한 후 즉석에서 “앞으로 열심히 해서 북조선을 잘 이끌어가라. 소련군은 이 사람에게 적극 협력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북한을 이끌어갈 지도자를 스탈린의 면접을 통해 결정했다는 점, 그리고 34세의 새파란 소련군 대위를 “항일투쟁의 영웅 김일성 장군”으로 날조한 것도 소련공산당이요, 북한의 국호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정해주고 스탈린 헌법을 모방해 북한 헌법을 만들어준 것도 소련공산당이었다.

스탈린의 뜻대로 만들어진 북한 정권
소련공산당의 등에 업혀 북한을 장악한 김성주 일파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가 만든 토지개혁법과 노동법령, 남녀평등에 관한 법령, 산업·운수·통신·은행 국유화 법령 등을 제공받았다. 이를 한글로 번역한 다음 북한 현실에 맞게 가공해 이른바 ‘민주개혁(공산화) 5대 법령’을 실행했다. 그 첫 번째 조치가 1946년 3월 5일부터 시작된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의 급진적인 토지개혁이었다.
1946년 2월 북한에서 시행된 무상몰수-무상분배 방식의 토지개혁은 개항 후 이 땅에 이식된 근대문명, 즉 사유재산 제도를 부정하는 처사로서 분단을 결정지은 최초의 중대 사건이었다. 또 북한의 토지개혁은 누가 뭐래도 해방된 한국은 공산국가로 가야 한다는 공산주의자들의 강력한 메시지였다. 분단을 향해 먼저 달린 것은 남북한의 좌익세력이었다.
1946년 3월 23일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김일성 명의로 앞으로 건설될 임시정부의 ‘20개조 정강’을 발표, “일제가 통치의 목적으로 시행한 모든 법을 폐지한다. 일제의 재판기구를 인민으로부터 선발된 대표에 의한 인민재판기구로 대체한다”고 발표했다. 근대적 인간으로서의 인격권과 재산권을 규정한 민법을 폐지하고, 사법(司法)에 의한 재판기구가 사라지고 인민재판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8월 2일에는 ‘중요산업, 교통, 통신, 운수, 은행 등의 국유화에 관한 법령’이 발표됐다. 이 법을 통해 과거 주로 일본인들 소유였던 중요 산업분야의 대기업체와 경제관련 기관을 국유화(사실은 공산당 소유)했다.
이처럼 급진적인 개혁으로 토지나 사업체를 빼앗긴 지주나 자본가들, 사회 지도자급 인사들, 기독교인 등 공산화에 걸림돌이 되는 지식층에게는 ‘친일파’라는 낙인을 찍어 남한으로 인종청소를 해버렸다. 북한을 떠나 월남한 사람들의 수는 1948년까지 약 100만 명, 이는 북한 전체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엄청난 인구였다.
스티코프가 쓴 일기(《쉬띄꼬프일기 1946~1948》)에 의하면 소련공산당은 북한의 제헌의회 격인 북조선 인민회의의 수립에서부터 실행계획과 대회진행 및 의사일정, 심지어 정당별 의석 배분, 의원들의 출신성분별 구성 인원 숫자까지 세세하게 결정한 다음 이를 지령했다.
선거도 아무나 출마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후보자는 소련군정의 의지를 충실히 따르는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북민전)이 결정했는데, 이들은 소련공산당의 심사를 거쳐 후보를 결정했다. 이렇게 결정된 후보를 대상으로 비밀선거가 아니라 감시자가 보는 앞에서 찬성자는 백색함에 반대자는 흑색함에 넣어 찬반 의사를 표시하는 방식으로 선출했다.
만약 대한민국의 제헌의원 선거 실시 과정에서 미군정이 선거도 하기 전에 정당별로 의석을 배분하고 출신 성분별로 인원을 정해놓은 다음 그에 맞춰 당선자를 결정했다면 그 선거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 있겠는가.

북한 헌법도 스탈린과 소련공산당이 만들어줘
1948년 4월 24일은 북한 현대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날이다. 이날 소련공산당 정치국이 ‘북한의 헌법문제’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날 모스크바 교외에 있는 스탈린의 별장에서 스탈린, 몰로토프 외상, 즈다노프 서기와 스티코프(당시 주북한 소련대사)가 참석한 가운데 북한의 헌법 제정으로부터 독립에 이르는 내용이 결정됐다.
북한 헌법은 스탈린 헌법을 참고해 모스크바의 법률 전문가들이 만들었으며, 국가를 건설하는 회의에 북한 측 대표가 아무도 참석하지 않고 소련 지도부가 일방적으로 결정했다.
이는 북한이 완벽한 ‘스탈린과 소련공산당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4월 24일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이 북한 헌법을 최종 승인한 5일 후인 4월 29일, 북조선 인민회의는 헌법 초안을 채택했다.
이때 평양에서는 김구와 김규식 등 남한의 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이 참여한 남북협상이 진행 중이었다. 북조선 인민회의는 새롭게 세워질 나라 이름을 소련공산당이 정해준대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결정했고 그때까지 사용해 온 태극기를 폐지하고 새로운 형태의 인공기를 제정했다. 이어 한국의 국회에 해당하는 최고인민회의 창설에 돌입했다.
1948년 6월 29일부터 7월 5일까지 일주일간 소련공산당의 지시에 의해 평양에서 제2차 남북연석회의가 열린 직후인 7월 중순부터 8월 초까지 남한에서는 남로당 중심으로 지하선거에 돌입했다. 좌익세력은 주로 야간에 은밀하게 좌익계 주민에게 접근해 미리 인민대표로 정해진 인사에 대해 지지하는 도장을 받았다.
이렇게 정해진 남한 대표 1080명은 대부분 남로당원이었다. 이들은 월북해 8월 21일 해주시 인민회당에서 열린 ‘남조선 인민대표자대회’에서 남쪽 대의원 360명을 선출했다. 8월 25일에는 북한 지역에서 ‘유일 후보제’ 방식(단독 출마자에 대한 찬반투표 선거)의 대의원 선거를 실시하여 북쪽 대의원 212명을 선출했다. 이렇게 선출된 남북 대의원 572명으로 제1기 최고인민회의가 구성되어 9월 2일 소집됐다.
1948년 7월 31일, 소련군정은 북한의 초대 내각과 최고인민회의 의장단 결정을 위해 심의에 돌입했다. 스티코프의 일기에 의하면 소련공산당은 북한의 내각 성원에 대한 인선은 물론, 최고인민회의 회의 장소와 청사, 내각 청사, 정부 선언문까지 작성해 김일성에게 넘겨줬다.
소련군정 사령부가 초대 내각과 최고인민회의 의장단을 구상하면서 가장 중요시했던 부분은 첫째 소련에 우호적이고 북한에서 실시한 소련 정책을 지지하는지 여부, 둘째 조선 해방 이전의 사회주의 혁명 활동, 셋째 일제 압박 속에서 투쟁 경력과 친일파 숙청에 대한 확고한 의지, 넷째 인민을 이끌 수 있는 정치력과 전문성이었다. 만약 미군정이 대한민국의 헌법을 제정하고, 국호를 정해줬으며, 대통령과 내각요원, 심지어 제헌국회의 의장단까지 정해줬다면 이 땅의 좌익들은 무엇이라고 공격을 했을까?

1인 독재로 위기 자초한 북한 정권 69년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위의 기준에 의거해 내각과 최고인민회의 의장단을 배치했다. 1948년 9월 8일,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제1차 최고인민회의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승인하고, 다음날인 9월 9일 김일성 수상은 소련공산당 당 중앙이 결정해준 내각 성원 명단을 발표하고 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북한은 1953년 이전까지만 해도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빨치산파와 국내 공산당파, 연안파, 소련파 등 4개 파벌이 권력을 분점하고 있는 연합정권이었다. 김일성은 자신이 일으킨 6·25남침전쟁이 휴전으로 마무리되자 권력독점을 위해 이들을 차례로 제거했다.
1961년은 남북한 역사에서 의미 있는 해다. 그 해 5월 16일, 남한에서 군사 쿠데타로 박정희 정권이 탄생했고, 북한에서는 제4차 당 대회를 통해 김일성이 자신의 권력에 도전할 만한 세력들을 차례로 제거하고 1인 독재체제를 완성했다.
1967년 김일성은 실용적 온건파를 숙청하고 극좌 노선을 걸으면서 사회 전반에 걸쳐 통제를 강화했다. 이러한 통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주체사상을 도입했다. 황장엽이 주체사상의 이론을 가다듬었다면 이를 북한 지배이데올로기로 만드는 데 앞장선 인물은 김정일이다. 김정일은 북한 권력의 2인자였던 김영주와 후계자 문제를 둘러싸고 각축을 벌였는데 이 과정에서 김일성 신격화를 위해 전대미문의 ‘수령 절대주의’라는 카드를 내놓았다.
주체사상은 수령과 당과 인민을 하나의 영생하는 사회정치적 생명체로 규정하고 그 유기적 상호관계를 수령은 최고의 뇌수, 당은 몸체, 인민은 수족으로 설명한다. 따라서 수령은 인민에게 사회정치적 생명을 부여하는 아버지 같은 존재이며, 인민은 생명의 근원인 수령을 목숨을 걸고 지키고 섬겨야 한다.
불행하게도 주체사상은 북한을 멸망의 길로 이끄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우선 인민대중이 ‘역사의 주체’라고 주장하면서도 반드시 수령의 올바른 영도를 받아야만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수령만이 진정한 주체이며 인민대중은 수령의 영도를 받아야만 하는 비주체가 되어버린다.
또 수령이 인민대중을 올바르게 지도하려면 단 한 점의 오류도 없어야 하는데 이러한 무오류는 유토피아에서나 가능한 주장이다. 게다가 수령의 유일지배를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수령을 절대 우위로 만드는 바람에 당의 존재를 해체시켜 버렸다.
결국 수령론은 북한 주민 전체를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세습 왕들의 영도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 로봇으로 전락시킴으로써 대중이 지닌 잠재역량을 사장시켰다. 게다가 ‘경제에서의 자립’은 자력갱생이라는 쇄국 폐쇄주의로 이어져 북한 사회의 후진화를 가속화시켰다.

첨부파일

네티즌 의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