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말하는 ‘戰後 국제질서’ 분석한·일 갈등 해법은 없나… (최익재 중앙일보 기자 동아시아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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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9-08-06 13:38:36

일본이 말하는 ‘戰後 국제질서’ 분석한·일 갈등 해법은 없나… (최익재 중앙일보 기자 동아시아학 박사)


8·15 광복절을 앞두고 한·일 갈등이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배
상 문제 등으로 촉발된 이번 사태에 대한 일본 정부의 태도는
그 어느 때보다 강경하다. 수출 규제라는 초강경 조치로 한국
정부를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앞서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가
일방적으로 양국 간 위안부 합의를 파기했다는 주장을 펴면서
신뢰할 수 없는 한국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급기야 아베 신
조(安倍晋三)가 이끄는 일본 정부는 최근 “한국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전후 국제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는 주장까지 내
놓고 있다.
이에 맞서 우리 정부는 “식민 지배에 대한 기본적인 반성이
결여된 일본의 행태”라는 입장이다. 정부 내 일부 인사들은 이
순신, 왜구 등을 언급하면서 일본과의 결사항전을 선동하기도
했다. 이젠 양국 간 갈등이 국민적 불매 운동으로 번지고 감정
적 대립이 극한으로 달리고 있어 그 후유증이 작지 않을 것으
로 전망된다.
과연 무엇 때문에 해방 이후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과거사
를 둘러싼 한·일 갈등이 지속되는 것일까? 일본은 과연 한반
도 식민지배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고 있을까? 1965년 한·일
협정은 제대로 맺어진 협정일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하나
씩 찾아가는 것도 현 상황에 정확한 진단과 대책을 마련하는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965년 ‘한·일 기본조약’
이번 한·일 갈등의 근원은 1965년 6월 양국이 전후(戰
後) 양국 관계의 정상화를 위해 체결한 ‘한·일 기본조약’
에서 비롯된다. 광복 이후 양국 간 갈등의 상당 부분은 여
기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한·일
청구권·경제협력 협정’도 이 기본조약의 주요 골자 중 하
나다. 지금까지도 일본의 배상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
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전후 처리과정에 기
인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과 관련된 배상과 재산·청구권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은 “이미 종결됐다”는 것이
다. 일본 측은 1951년 9월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및 관련 조약 등을 기반으로 북한을 제외한 조약 당사국
과의 법적인 문제를 모두 해결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 아시아 각국에서는 일본의 전후 처리에
대한 불만이 적지 않았다. 홍콩의 ‘군표(軍票) 보상 요구’
도 그 중 하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표는 일본군이
전쟁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찍어낸 특수화폐다. 자체적으
로 돈을 발행하고 이를 지불수단으로 현지에서 전쟁 물
자를 조달했던 것이다.
일본군은 홍콩 외에도 필리핀, 미얀마 등 여러 곳에서
군표를 발행했다. 2차 대전이 종전됐을 때 홍콩에는 약
19억 엔 상당의 군표가 남아있었고, 전쟁 기간 중 강제로
군표를 매입해야 했던 현지인들은 전후 이를 보상해달라
고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거부했다. 이처럼 한·
일간 강제징용자 보상 문제 외에도 일제에 의해 자행된
비도덕적인 행위들 중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적지 않다.
일본 정부가 아시아 각국들의 요구를 무시하는 근거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다. 일본 측은 이 조약의 배상
규정에 의거해 이미 각국과의 협상을 통해 모든 배상과
보상이 완료됐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日, 미·소 냉전으로 패전국서 ‘反共 보루’로
그렇다면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은 일본에게 어떤 의
미일까? 전후 일본의 운명은 미국의 손에 좌우됐다. 폐지

위기를 맞았던 ‘천황(天皇·일왕)제’가 존속될 수 있었던
것도 미 군정의 전략적 판단 때문이었다. 일왕은 일본이
전쟁 명분으로 내세웠던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의 핵심적 존재였다. 일본은 아시아인들이 서양세력으로
부터 해방되기 위해선 일왕을 중심으로 결속해야 한다는
대동아공영권을 앞세워 아시아 각국을 침략했다.
일본은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참전하게 된
미국과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 맞서다가 결국 1945년 8
월 패망했다. 양국 관계에서의 아이러니는 전후에 발생
한다. 종전 후 전후 처리과정에서 일본이 패전국 이상의
지위와 역할을 부여받게 된 것이다.
이는 2차 대전 이후 시작된 냉전 체제 덕분이었다. 동
유럽에서의 소련 공산주의 팽창을 목격한 미국은 동북아
에서 소련을 억지하지 위해 전력을 기울여야 했다. 특히
1949년 중국의 공산화와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은 미국
에겐 큰 자극제가 됐다. 이때 미국이 요구하는 일본의 역
할은 바뀌게 된다. 일본은 전쟁 책임을 엄격히 추궁 받아
야 할 패전국에서 공산주의 팽창을 막을 핵심 거점으로
변신했다. 이 같은 일본에 대한 전략적 가치의 변화는 일
본 정부의 전후 처리 방식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 것은 불
문가지다.
따라서 미국의 주도로 1951년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 일본에 대한 징벌적 배상 등 전쟁 책임을 강
력히 묻기보다는, 공산주의 팽창을 막기 위한 일본 체제
의 유지에 활용됐다는 점은 우리에겐 큰 아쉬움으로 남
는다.
한반도와 대만은 戰後 처리서 ‘분리지역’ 으로 규정
일본을 포함한 49개국이 서명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
약에서 한국의 지위가 애매했던 것도 당시 우리에겐 불
행이었다. 당시 한국은 이 조약의 서명에 참여하지 못했
다. 필리핀,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등과 달리 이 조약은
한반도와 대만을 ‘분리지역’으로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
다. 과거 일본의 통치를 받았지만 패전으로 인해 일본으
로부터 분리된 지역이라는 의미다. 일본과 교전 상태에
있었던 연합국 또는 그 연합국의 지배하에 있었던 지역
과는 명백히 구별되는 개념을 적용한 것이다.
한반도와 대만이 분리지역으로 규정된 것은 1946년 극
동전범재판소의 판결에서 비롯된다.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 제11조는 극동전범재판소의 판결을 수용한 것으로,
이 재판소는 재판 대상에서 조선인과 대만인 피해자를
배제했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이후 승전국들은 이 조약의 제
14조에 의거해 일본과의 협상을 통해 배상(Reparation)을
받았고, 분리지역은 별도로 제4조에 의해 청구권 협정을
맺게 된다. 제4조는 불법행위에 대한 조치라는 개념을 내
포한 배상을 적용하는 대신, 식민지에서의 분리에 따른
상호 재산 및 청구권의 처리를 규정하고 있다. 즉, 제4조
는 한반도와 대만 등 분리지역과의 재산·청구권 문제의
경우 일본이 특별협정을 맺어 해결하도록 했다. 이후 열
린 한·일회담도 이를 기반으로 진행됐다. 하지만 양측의
청구권 규모와 그 성격에 대한 인식 차이는 컸고 이를 보
완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 경제협력 방식이었다.
이는 재산 청구권에 대해 일일이 변제하는 대신 포괄적
으로 유무상의 자금을 제공해 그 권리를 한꺼번에 소멸
시키는 방식이다. 14년간의 협상 끝에 ‘한·일 청구권·경
제협력 협정’이 체결된 배경이다. 당시 일본이 제공한 무
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는 이에 근거한 것이다.
일본, 戰後 보상 과정서 경제지원 인식 강해
이 대목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일본 정부가 당
시 자신들이 일으킨 전쟁에 대한 진정한 사죄와 반성 그
리고 피해 복구를 위해 이 같은 조치를 취했느냐다. 오히
려 일본은 당시 한국을 포함해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대
해 경제적 협력 또는 지원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갖고 있
었다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그렇다면 유사한 상황에 처했던 독일의 전후 처리는 어
떻게 진행됐을까? 왜 일본과 달리 독일의 경우 별다른 문
제가 발생하지 않을까? 독일과 일본의 2차 대전 전후 처
리에서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는 독일은 강화조약 자체
를 체결하지 않았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유럽이 급격히
냉전 시대를 맞으면서 동독과 서독이 나뉘는 분단 상황에
서 강화조약을 맺을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
일의 전후 처리는 나치에 의해 피해를 당한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이라는 개념이 적용됐다. 일본과 달리 경제적
협력이나 지원의 성격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보상을 떠안은 서독 정부는 1956년 6월 ‘나치
박해 희생자를 위한 보상에 관한 연방법’을 제정하고, “나
치즘을 적대하거나, 인종, 신앙, 세계관 등의 이유로 나치
권력 하에 박해를 받은 사람들에 대한 불법 행위를 인정
해 이 법을 제정한다”고 밝혔다. 독일이 일으킨 2차 대전
에 대한 포괄적인 책임을 규정한 법으로 피해국들은 이를
통해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일본 정부가 경제협력이라
는 명목으로 전쟁 피해국들에게 자금을 지원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조치였다. 통일이 된 지금도 독일 정부는 나
치에 의해 자행된 피해에 대해서는 끊임없는 사죄와 반성
을 쏟아내고 있다.
일본이 주장하는 戰後 국제질서는 ‘인권 무시’
이번 한·일 갈등에서 일본 정부의 역사의식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는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다. 바로 지난 7월
19일 오전 고노 다로(河野太郎) 일본 외무상이 남관표 주
일 한국대사를 외무성으로 초치했을 때다. 고노 외상은
“지금 한국 정부가 하고 있는 것은 2차 대전 이후 국제질
서를 근저에서 뒤엎는 일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했다. 남
대사의 발언을 중간에 끊고 “한국이 극히 무례하다”고 했
던 것은 차치하더라고, 고노 외상의 ‘국제질서’ 발언은 일
반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것으로 평가된
다. 특히 식민지 침략전쟁을 벌였던 가해자의 입장에선
내뱉을 수 없는 발언이다. 왜냐면 그의 발언이 전후 처리
에 극히 미비했던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근거하고 있
기 때문이다.
외교전문가인 고노 외상 스스로가 이 조약이 일본의 진
실한 사죄 대신 경제적 지원을 앞세워 합의의 성격을 띤
강대국의 국익 논리에 충실했던 조약이었다는 것을 몰랐
을까? 아니면 이를 애써 외면하면서 또다시 강대국의 동
조를 얻어 일본의 이익을 지키려는 얄팍한 상술일까? 인
류에겐 보편적 가치가 존재하며 이를 존중하는 것이 올
바르게 국제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 보편적 가치의
기저에는 인권과 행복 추구라는 기본적인 권리가 깔려
있다. 따라서 한국이 이번 사태 해결을 위해 추구해야
하는 것은 어설픈 외교적 해법이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식의 ‘맞짱’ 해법이 돼선 안 될 것이다. 과거와 마
찬가지로 또 다시 유사한 갈등이 언제든지 재발할 수 있
기 때문이다.
일본의 행태가 국제사회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인
간의 존엄성에 대한 도전’이라는 국제적 여론을 확산시키
는 전략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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