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의 정신 일깨워 용서와 화해, 국민통합을 통한 미래지향적 발전 이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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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9-03-06 10:05:52

선종률 한성대 교수, 한국보훈학회 회장


3·1운동은 191931일을 기점으로 일본의 무단통치에 저항해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운동을 전개한 것으로 전국의 거의 모든 지역과 해외 동포까지 망라된 한민족의 전 역사상 최대 규모의 거대한 민족운동이었다.

19193월에서 4월에 걸쳐 국내적으로 전국 220개의 군 중 96%에 달하는 211개 군에서 운동이 발생했고 운동에 참가한 인원은 국내에만 해도 951008명으로서 19193월 당시 조선 전체 인구 16788400명의 5.7% 가 시위에 직접 참가한 것으로 조사됐다. 또한 서·북간도를 비롯한 남·북만주 일대와 중국 본토 각지, 러시아 연해주, 미주, 하와이, 일본 등에 흩어져 살던 해외 한민족 참가자 약 8만 여 명을 포함해 최대 10373명이 직접 참가한 거대한 민족운동이었다.

약 두 달동안 전국에서 일어난 시위와 파업, 휴학 등이 2464건이었고 이 가운데 시위는 1692건이었다. 이 기간 해외에서 일어난 시위도 99건이었고, 운동기간 중의 사망자만 해도 최대 934명에 달했다. 이러한 통계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해 3년 간 진행한 데이터베이스 구축사업의 결과로 최근 공식 발표한 것에 따른 것이다.

3·1절은 1920년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의해 3·1 운동과 그 정신을 기념하는 행사를 하면서 민족적인 축일로 발전했다. 194631일 제27회 기념식을 시초로 국가 경축일로 지정되고, 1949101국경일에관한법률을 공포함으로써 국경일로 정식 지정됐다.

2019, 올해로서 우리는 3·1운동 발생 100주년을 맞이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100년 전과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발전했다. 그러나 우리의 바람직한 미래를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와 더욱 발전해야 하는 분야가 여전히 남아 있다.

다음에서 제시하는 3·1운동의 성격과 의의는 오늘날 3·1운동 100주년에 즈음해 향후 100, 미래의 대한민국이 나아갈 방향을 잘 가르쳐 주고 있다.

 

3·1운동의 성격

: 최대의 민족운동이며 자주적 비폭력운동

3·1운동의 성격은 첫째 한민족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이었다. 채 두 달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에 전 국 각 지방의 96%, 전 인구의 5.7%가 동참해 24백여 회의 시위를 벌이고, 국외에서까지 그 많은 시위를 벌였 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당시는 오늘날과 같은 방송이나 SNS 등을 통 한 대량전파 수단이 아닌 직접 전달만이 가능하고, 게다 가 일본의 관헌에 의한 감시와 탄압이 극심한 상황이었 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로 경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둘째 3·1운동은 우리 민족정신의 근간에 흐르는 불굴 의 자주·자위의 운동이었다. 이러한 정신은 3·1독립선언 서의 서두에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 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 이로써 세계 만국 에 알려 인류 평등에 큰 도의를 분명히 하는 바이며, 이로써 자손만대에 깨우쳐 일러 민족의 독자적 생존 에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려 가지게 하는 바이다. (이하 생략)

또한 우리 민족은 위기시에 정의를 위해 자발적으로 민병을 조직해 나라와 지역사회를 지켜낸 전통이 있다. 이는 의병이라고 일컬어지며 의병의 전통은 이미 삼국 시대부터 비롯됐으며, 고려·조선 시대를 거쳐 조선 말 기에까지 이르렀다. 특히 조선 말기의 의병은 항일 독립 군의 모태가 됐다.

셋째 3·1운동은 대표적인 비폭력운동이다. 독립선언 서 말미에 제시한 공약 삼장은 독립운동이 폭력과 무 질서 및 파괴행위로 변질되지 않도록 다음과 같이 경 계하고 있다.

1, 오늘 우리의 이번 거사는 정의, 인도와 생존과 영 광을 갈망하는 민족 전체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 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인 감정으로 정도에 서 벗어난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중간 생략)

1, 모든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며, 우리의 주장 과 태도를 어디까지나 떳떳하고 정당하게 하라.

3·1운동 당일 종로거리에서 시작된 만세시위 행진은 해질 무렵에는 교외로 번져나가 수만의 군중이 날이 저 물도록 시위를 했다. 그러나 31일 당일 폭동사례는 1 건도 발생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두 달 넘게 이어진 반일 투쟁에도 불구하고 시위대에 의해 죽은 일본 민간인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이 3·1운동의 비폭력성을 입증 하고 있다. 더욱이 3·1 만세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과격 양상을 띠려는 조짐이 보이자 전국적으 로 자제단을 결성해 이를 방지하려고까지 했던 것이다.

 

3·1운동의 의의

: 평화 지향·민족정신 일깨움·대한민국 뿌리

3·1운동이 가지고 있는 첫번째 의의는 평화를 지향하 며 용서와 화해의 정신을 대표하는 운동이라는 점이다. 이는 독립선언서에서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앞 생략) 일본의 배신을 죄주려 하는 것이 아니다 (중간 생략) 결코 묵은 원한과 일시적 감정으로써 남 을 시새워 쫓고 물리치려는 것도 아니로다(중간 생략) 이 어그러진 상태를 바로잡아 고쳐서 자연스럽고 합리 적인, 올바르고 떳떳한 큰 근본이 되는 길로 돌아오게 하고자 함이로다(중간 생략) 또 동양 평화로써 그 중요 한 일부를 삼는 세계 평화와 인류 행복의 필요한 단계 가 되게 하는 것이다(중간 생략) 다만, 앞길의 광명을 향하여 힘차게 곧장 나아갈 뿐(이하 생략)

일본의 잘못은 준엄하게 꾸짖되, 단죄를 하고 보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길로 돌아오도록 하고 동양평 화와 나아가 세계평화에 이르도록 하겠다는 숭고한 이 념을 나타냈다. 그 결과 3·1운동은 조선의 멸망을 당연 시하고 일본에게 긍정적이던 해외의 관점을 개선시키 고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켜 한국민에 대한 새로운 인식 을 갖게 했다. 후에 중국의 5·4운동과 인도 간디의 비 폭력·불복종 운동, 이집트의 반영자주운동, 터키의 민 족운동 등 아시아와 중동 지역 민족운동 등에도 영향 을 끼치게 됐다.

 

3·1운동의 두 번째 의의는 일본의 압제 하에서 무력하 기만 하던 민족정신의 역동성을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 는 점이다. 1910년 워싱턴헤럴드 기사에 한국은 현대화 과정에 대한 요구에 귀를 닫아 온 은둔의 왕국으로 묘 사되고 있다. 일본이 한국을 병합할 준비가 됐다고 발표 했다는 소식 뒤에는 항의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한 국인들은 저항할 힘이 없었다고 보도해 당시 암울한 조 선의 상황을 알려줬다.

그러나 3·1운동은 우리 민족에게 이민족에 대한 끈질 기고 강렬한 독립투쟁 정신을 일깨웠을 뿐 아니라 민족 의식과 민족정신에 새로운 자각과 힘을 주어 교육의 진 흥·신문예운동과 산업운동이 활성화되어 민족 자립의 기초를 다지도록 했던 것이다.

3·1운동의 세 번째 의의는 민주공화국 체제의 대한 민국 임시정부의 토대가 됐고 나아가 오늘날 대한민국 의 뿌리를 이루게 됐다는 점이다. 우리의 헌법 전문에는 1948년 제정된 최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3·1운동의 계승을 명시하고 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이하 생략)

3·1운동을 계기로 한반도를 비롯해 해외 각지에서 존재하던 독립운동 구심체가 통일된 민주주의 제도의 임 시정부 수립운동으로 이어져, 서울의 한성정부의 법통 을 이어받아 연해주 대한국민의회가 상하이 상해정부 로 합쳐지는 형태로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3·1운동 100주년의 대한민국

: 민주화와 경제화 달성

3·1운동 당시 조선의 실정은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대 표적 여성 여행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한국을 여행하 고 쓴 책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을 통해서 엿볼 수 있 다. 그녀는 이 책에서 한국은 특권계급의 착취, 관공서 의 가혹한 세금, 총체적인 정의의 부재, 모든 벌이의 불 안정, 비개혁적인 정책 수행, 음모로 물든 고위 공직자 의 약탈 행위, 하찮은 후궁들과 궁전에 한거하면서 쇠약 해진 군주, 민중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미신, 그 리고 자원 없고 음울한 더러움의 상태에 처해 있다.” 라 고 하며 조선왕국에 대해 총체적 사망 선고를 내렸다.

그러나 2019년 오늘의 대한민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에서 독립한 국가 중에서 유일하게 민주화와 경제 대국화를 달성한 유일한 국가가 됐다. 과학기술력·국방 력·경 제력·정 보력·교육 력·기 초국 력·환경 관 리력 등 하 드파워 분야 평균 세계 9, 국정관리력·변화대처력· 외교력·문화력·정치력·사회자본력 등 소프트파워 분야 평균 세계 12위로 평가를 받는 수준이 됐으며 과거 지원을 받던 국가에서 이제는 지원을 하는 국가로 완전 탈바꿈 했다.

한편 이렇듯 엄청난 발전의 이면에는 해결해야 할 많 은 문제가 상존하고 있다. 세계 역사상 6번째로 가장 참혹한 전쟁으로 평가되는 6·25전쟁을 치룬 대한민국은 아직도 세계 유일의 분단국으로서 무력 대치 상태 가 지속되고 있으며, 일본과는 과거사를 둘러싼 갈등 이 좀처럼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 등 초강대국 사이에서는 빈번히 선택의 딜레마를 겪고 있다.

또한 2016년 국민통합위원회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사회갈등은 매년 악화되고 있다고 한다. 그 중에 도 계층갈등이 가장 심각한 83.3%를 나타냈고, 이념갈 등과 노사갈등은 각각 약 76%, 세대갈등과 지역갈등 및 환경갈등도 각각 50%대 중반으로서 매우 심각한 수준 으로 나타났다.

앞서 살펴본 3·1운동의 성격과 의의로부터,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한 오늘날 우리가 봉착하고 있는 많은 국가적인 문제와 사회적 갈등에 대한 해결의 방법을 찾 아내야 할 것이다.

 

3·1운동 정신과 미래과제

최근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해 정부를 비롯한 사회 각계에서 그 의의를 재조명하는 노력이 전개되고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그 노력이 3·1정신을 제대로 이해 하고 계승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추진돼야 하며, 그 핵심 은 용서와 화해, 국민통합을 통한 미래지향적 발전에 모 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는 이제 용서와 화해의 아 량을 통해 해결책을 찾는 지혜가 필요하다. 용서와 양보 는 우월감에서, 아니면 최소한 굴복으로 비쳐질 것에 대 한 우려가 없을 때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서 자신감의 표출이다. 3·1운동 당시 일본의 압제하에 근 10년을 지 낸 상황에서 보여줬던 용서와 화해의 모습은 우리 민족 의 의연함 그 자체였다. 오늘날 한·일관계 해법에도 이러한 정신의 계승이 요구된다. 한 예로서 지난해 강제징 용 피해자들에게 일본 기업이 배상금을 지급하라는 대 법원의 판결 후, 우리가 한국과 일본은 모두 이러한 판 결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배상금은 한국 정 부가 지급하겠다고 했다면 일본보다 우월한 입장에서 한·일관계를 이끌어갈 수 있었으리라는 아쉬움이 있다.

분단과 대립의 문제는 3·1운동 당시 발휘됐던 민족동 질성을 바탕으로 이념의 간극을 좁히고 상호신뢰를 증 진해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해 나가야 한다.

강대국과의 외교 문제는 3·1운동의 자주정신을 기본 바탕으로 삼아 의연한 자세로 대처해 나가면 될 일이며, 우리 사회에 만연한 사회적 갈등도 평화 지향의 3·1운 동 정신에 의한 국민통합을 통해 해소해 나갈 수 있으 리라고 생각한다.

국민통합은 우리 대한민국이 통일과 선진화된 미래 로 나아가는 데에 필요한 동력의 원천이다. 이를 위해서 는 국가유공자들에 대한 처우에 있어서 갈등의 요인이 되고 있는 보상자 선정과 보상 규모의 형평성을 이뤄야 한다. 보훈대상자에 대한 예우와 지원이 물질적인 차원 을 넘어 명예와 존경이라는 정신적인 가치에 보다 중점 을 둬야 한다.

또한 독립운동 등 국가를 위해 희생한 사람과 그 유족 에 대해서는 국가가 끝까지 책임을 지는 보훈복지를 달성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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