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독립운동가-김마리아(1892. 6. 18.~1944. 3. 13.)

  • No : 2377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9-02-07 11:45:16


고학 생활 중에도 한 시도 조국 독립의 염원을 버리지 않고 근화회를 조직해 지속적 항일투쟁 전개

 

 

선생은 1892618일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1918 18일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발표되고, 이듬해 1월부터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알려지게 됐다.

재일 동경 유학생들은 한국 독립의 절호의 기회로 이 용하고자 독립선언을 준비했다. 이것이 동경 유학생들 의 2·8독립선언 계획이다, 선생과 황애덕을 비롯한 여 자 유학생들도 참여해 활동했다.

선생은 2·8독립선언문 10여 장을 미농지에 복사해 옷 속에 감추고는 현해탄을 건너 217일 동경을 출발 해 부산에 도착했다. 교육계·기독교계·천도교계의 지 도자들을 만나 국내에서의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촉구 했다. 3·1운동 날에도 선생은 여성들에게 독립운동 참 여를 촉구했고 선생은 배후 지도자로 지목되어 학생들 과 함께 체포됐다.

출감 후 선생은 정신여학교 동창과 교사들이 중심 이 된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조직과 활동 상황을 알게 됐다. 선생과 임원들은 애국부인회의 조직 확대와 여성 독립운동의 활성화 방안을 논의한 뒤, 선행 조치로 선 생을 회장, 황애덕을 총무부장으로 선임했다. 이후 중 국 남경대학에 입학해 일본에서 못 다한 공부를 계속 하는 한편, 상해의 대한애국부인회에 참여하여 활동했 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황해도 대의원으로 선출되어 활약했다.

상해에서의 독립운동의 난맥상과 분열에 실망한 선 생은 못다한 공부를 마치기로 결심하고, 1923621 일 미국 유학을 위해 상해를 떠났다. 그리고 19282 12일 황애덕·박인덕 등 미국에 유학 중인 여학생들 을 중심으로 여성 독립운동 단체인 근화회를 조직했다.

19327월 귀국했고, 종교 모임과 강론을 통해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등 지속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선 생은 고문 후유증이 재발함에 따라 병원에 입원해 치료 를 받던 중, 1944313일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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