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5주년에 되돌아본 <민주사회의 변화와 발전> -한국 민주사회의 태동

  • No : 4074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20-08-04 16:04:31
  • 분류 : 자유마당

호광석(사단법인 정부정책연구원 원장)

  

1945815일 광복을 맞은 이래 올해로 광복 75주년이 됐다. 36년 간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난 지 3년 만인 1948년 분단 상태에서 정부를 수립하고, 2년 후인 1950년에 전쟁이 발발하여 유엔과 국제사회의 군사적 및 경제적 지원을 받아야만 했던 나라가 이제는 K-popK-movie로 대중문화를 선도하는 세계적인 국가의 명성을 얻은 데 이어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의 방역 모범국가라는 국제사회의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러한 변화와 발전과정을 거쳐 오는 동안 우리 사회가 부단히 지향해 온 것은 바로 민주주의가 성숙한 민주사회이다. 우리 헌법의 정신도 그렇고, 실제 우리 사회가 경험해 온 지난날의 역사가 민주주의를 향한 갈망과 외침의 연속이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에 광복 75주년을 맞아 민주사회로의 역정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노력해 왔거나 관련성이 높은 요소들, 즉 국가지도자, 정부, 국회, 정당, 선거, 시민운동 등을 집중적으로 조명해보는 기획연재를 통해 한국 민주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광복 5주년이 된 1950, 6.25전쟁이 발발해 군사적·경제적 원조를 국제사회로부터 받아야만 했던 대한민국은 1991년에 유엔회원국이 되고, 이어 1996년에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의 회원국이 됐다.OECD 회원국의 기본자격인 다원적 민주주의 국가로서, 시장경제 체제를 유지하고, 인권을 존중하는 국가로 평가받을 만큼 성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97년 외환위기로 IMF 사태를 겪었지만, 전 국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3년여 만인2001년에 애초 예정보다 3년 빨리 IMF 관리체제를 종료하는 나라가 되기도 했다. 이어 K-popK-movie로 대중문화를 선도하는 세계적인 국가로 인정받은 데이어 2020년에는 코로나19의 방역 모범국가로 평가받으면서 ‘K-방역이라는 신조어까지 탄생시켰다.


이러한 변화와 발전과정을 거쳐 오는 동안 우리 사회가 부단히 지향해 온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민주주의가 성숙한 민주사회이다. ‘민주를 몇 차례 반복한 전문에 이어 제1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명시하면서 시작되는 헌법의 정신도 그렇고, 실제우리 사회가 경험해 온 지난날의 역사가 민주주의를 향한 갈망과 외침의 연속이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와 같은 에 대한 기획연재의 첫 번째로 이 글에서는 우리 사회에 민주주의는 언제부터 등장하고 민주사회는 어떻게 시작되는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19세기 말 민주주의개념 전해져

근대 이전 조선시대에는 민주주의는 없었고, ‘민본주의(民本主義)’가 있었다. 주인은 아니지만, ‘으로 삼아야 한다는 정신이 있었다. 19세기 말에 가서야 서세동점(西勢東漸: 서쪽 세력이 동쪽으로 점점 밀려온다) 현상과 함께 서양에서 발생한 민주주의가 들어오기 시작한다.


중국 등을 통해서 들여온 서책과 지구의(地球儀) 등으로 세계의 사정을 살피면서 지구상에 여러 나라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각 나라의 실상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1857년에 최한기가 완성한 지구전요(地球典要)에는 미국의 프레지던트와 의회, 영국의 상·하 양원제 등을 서술하고 있다. 1881년 일본 시찰단은 시찰보고서에서 개화된 일본의 자유 민권 운동, 헌법제정 및 국회개설 요구 시위, 선거 등의 낯선 실상들을 기록해 전하고 있다.


18831121일 당시 고종이 보빙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에 갔다 5개월 8일 만에 돌아온 홍영식을 만나 미국과 세계 여러 나라의 실상에 대해 길게 대화를 나눴다. 홍영식의 복명문답기(復命問答記)에 따르면 고종은 정치문제에 관심이 가장 많았는데, 여러 가지 질문과 답변이 오가는 중에 미국과 유럽은 정치를 운영하는 방식이 다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이에 홍영식은 영국, 독일 같은 나라는 군주 자리를 세습하고, 관리도 바뀌지 않습니다. 아마도 군주제와 민주제에서 나라를 운영하는 법이 다른 듯 합니다.”라고 답변을 한다.


그러자 고종은 민주제를 하는 나라는 우리처럼 신분이 높은 사람과 보통 사람 사이의 차별이 두드러지지 않겠구나……라고 말한다. 고종이 직접 민주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면, 그 이전에 민주제나 민주국가라는 말을 알고 있었으며, 이는 홍영식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한편 한성순보1884130일자에서는 서양 여러 나라의 정치를 군민동치(君民同治)와 합중공화(合衆共和) 두 종류로 설명하고, “군주 및 민주를 막론하고 모두 상·하의원을 설치한다는 등의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일부 인사들이 민주라는 용어를 사용했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도입됐다고 할 수는 없다. 특히 당시 일본을 통해 개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던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 개화당 인사들이 188410월에 주도한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고, 조선에서의 청·일 등 외세의 힘겨루기와 간섭은 더욱 심해졌다. 비록 그 인사들에 의해 민권, 의회, 입헌정치 등의 용어는 점차 알려지게 됐지만, 민주주의가 발아될 만한 여건이 충분히 형성되지는 못했다.


더욱이 1894년 동학농민혁명으로 민중 자치를 실천하던 와중인 6, 일본군이 청일전쟁을 도발하면서 개화당 인사들은 갑오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들은 일본의 개혁을 선망한 나머지 궁극적으로 일본에게 의존하는 선택을 했고 농민군이 일본과의 전쟁을 선포하자 군 지휘권을 일본에 넘기고 농민군 진압에 나서기까지 한다.


1896년에는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창간함으로써 공론장의 역할을 하게 되고 독립협회를 결성해, 이른바 시민사회단체의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자주독립’, ‘애국등의 용어들이 사용되기 시작하고, 18978월에는 독립협회가 주최하는 시민토론회도 처음으로 열었다. 그로부터 두 달 뒤인 10월에 고종은 황제에 즉위하고 나라 이름을 조선에서 대한으로 고침으로써 대한제국이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민권을 강조하던 독립협회와 입장이 분명히 달랐던 고종황제는 189812월부터 독립협회 및 모든 정치사회단체를 해산시키고 1899대한국 국제를 제정하여 민권이 아닌 황제권을 절대화하고 만다.



일제강정기, 독립운동과 민주주의인식 확산

1907년 고종황제가 일본에 의해 강제 퇴위당한 데이어 1910829일 우리의 주권이 일본에 강탈당하는 치욕을 겪게 됐다. 그러나 동시에 이로써 군주제는 존재 이유를 상실했다. 이미 미국 내 한인 단체들을 중심으로 국권회복운동이 전개되어 오고 있는 가운데 독립과 자유를 지향하는 대한신민회를 결성한 후 안창호등이 귀국해서 신민회 국내 지부 건설을 추진하기도 했다. 해외 인사들은 망국의 원인을 전제정치에서 찾고 공화제를 목표로 하자는 주장을 폈지만, 국내 인사들은 공화제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즉각 동의를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11년 중국의 신해혁명으로 4천 년을 이어 온 전제정치를 타파하고 공화정체를 건설하는 일대변혁이 성공하게 된다. 중국이 군주국에서 공화국으로 변신해 중화민국(Republic of China)’을 선포하자 국내 인사들은 중국을 방문해 혁명지도자 쑨원 등을 만나 신해혁명에 대해 학습하는가 하면 박상진은 귀국해 대한광복회를 조직했다. 중국의 변화는 독립운동가들이 군주제가 아닌 민주공화제를 독립 후 국가상()으로 수용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19193·1운동을 계기로 임시정부 조직 움직임들이 일어났는데, 서울에서는 경성독립단이 국호를 신한민국이라 명명하고 임시정부 구성을 추진했다. 경성독립단 인사들은 중국 상해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준비하던 망명 인사들과 임시의정원을 조직하고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했다. 이미 빼앗긴 나라가 대한이었으므로 되찾는 나라도 대한이어야 하지만, 공화국을 지향하니 제국이 아니라 민국이어야 한다는 뜻에서 합의가 이루어진 결과였다. 이러한 논의 결과 탄생한 것이 상해 임시정부이고, 그 날이 1919411일이었다. 상해 임시정부는 임시의정원의 결의를 거쳐 임시헌장을 선포했는데, 1조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으로 시작한다. 이어 423일 서울에서는 한성 임시정부가 탄생했는데, 그 약법에서도 제1조에 국체는 민주제도를 채택함이라고 천명하고 있다.


이렇게 독립운동 시기 임시정부들을 비롯해 여러 독립운동 단체들이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있었다는 점을 들어 항일 독립투쟁의 한 가지 성격을 민주혁명이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실제로 일제강점하 총 460개 독립운동 단체의 정치강령과 정책을 조사한 결과, 전체 52.9%244개가 민주공화국 건설을 표방하거나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민주주의 지향형 단체였다.


192041일자 동아일보는 창간사에서 민주주의를 지지하노라라는 항으로 민주주의는 국체나 정체를 가리키는 말에 그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인간 삶의 가장 큰 원리이자 정신이니라고 밝히고 있다. 이제 이 땅에서 민주주의는 독립운동이 전개되어 가는 항로요, 독립국가가 지향해야 할 목표로 되면서 시대에 유행하는 용어가 됐다. 그렇지만, 아직 민주주의는 일반 대중에게까지 이해되는 수준은 아니었으며, 더욱이 일제의 식민지통치 하에서 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없는 근본적인 한계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군정 하에 민주주의의 본격적 이식

우리 사회에 민주주의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은 해방된 이후 미군정(美軍政)으로부터 비롯됐다. 미국의 군사적 한국점령의 기본목표는 한국인의 독립을 돕고 한국인의 자유 선택에 따라 민주적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는데, 미 국무부·육군부·해군부의 ‘3부조정위원회(SWNCC)’의 기본훈령에는 자주 독립국가의 건설을 가져다주게 될 조건들을 촉진일본 통치의 잔재들을 점진적으로 일소독립된 한국의 행정적·경제적·사회적 제도로서의 궁극적인 대체라고 적시돼 있다. 그러나 소련과의 이데올로기적 갈등이 심화함에 따라 미국식 민주주의 확산의 필요성이 점증됐고 이로써 미군정의 민주화 정책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이 밝힌 한국에서 미국의 중요한 정책목표 중에는 민주한국과 자주정부 수립 노력 강화’, ‘미국식 민주주의체계 속에서 한국인 교육’, ‘민주적 선거방식’, ‘민주적 의회의 설립등이 포함돼 있다.


실제로 미군정은 1946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구성해 의회정치를 구현하려고 했는데, 입법의원을 인민이 정부 운영에 참여하는 민주주의적 한 표현으로서 보았다.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의회제도가 대의 민주정치의 요체인 점을 고려한다면,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19485월에 해산되기까지 곧 수립될 정부의 입법부로서의 준비단계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입법의원들 중 민선의원 선거는 보통·평등·직접·비밀의 4대 원칙을 준수하고,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남녀 모두에게 부여함으로써 남녀평등권을 법적으로 보장했으며, 모든 국민의 정치참여를 제도화했다.


또한 미군정이 이식한 민주제도의 하나는 정당제도였다. 어떤 형식으로든 정치적 운동에 종사하는 3인 이상의 단체를 정당으로 규정, 등록제를 실시했다. 이에 따라 19466월 등록된 정당 수가 107개에 달했고, 1947년에는 344개에 이르는 등 난립 현상이 발생했으나, 합법적인 정당 활동을 보장함으로써 대의 민주정치의 기본요소를 제도화하는 장치가 마련됐다.


아울러 미군정은 일제의 악법 및 법령 등을 모두 폐지하고 인신보호 영장제도를 도입하여 인권을 보호하는 법치국가를 지향토록 했으며, 사법권의 완전독립을 보장하기 위해 법원조직법을 공포하는 등 법치주의를 도입했다. 사법권의독립은 민주주의의 3권분립을 완성하는 한 축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으며, 법치주의는 과거에 신분적 특권이 용인되던 것과는 달리 일반 법률에 따라 통치함으로써 제도적으로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동등하게 보장하는 것이었다.


미군정을 통해 보급된 기회균등의 평등사상도 민주주의 이식에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특히 교육, 노동, 소작제도 등에 보급된 평등사상은 큰 변화의 시작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우선 미국식 민주주의 이념을 기초로 한 교육정책의 경우 각급 학교에 개설된 공민(公民 :Civics)’ 과목은 민주시민의 자질을 함양케 함으로써 정치사회화에 큰 공헌을 했다.


노동정책의 경우는 노동조합 설립의 자유를 인정하고, 노동운동을 장려하면서 고용계약을 통해 고용주와 노동조합 간의 합의 협정을 장려했다. 또한 중앙과 지방에 각각 노동조정위원회를 설치, 노동정책의 민주화 역할을 담당토록 했다.

소작제도의 경우 미군정은 사회정의를 위한 사회제도 혁신 차원에서 접근했는데, ‘과거 절대적 노예상태에 있던 계층을 구출’, ‘일본이 수탈한 토지를 농민에게 반환’, ‘근로의 산물을 농민에게 공평하게 분배’, ‘소작료는 산물 총액의 1/3 이하등의 대책을 규정했다. 전국민의 7할 이상이 농민이고, 그중 대부분이 소작인으로서 총 농가 수의 86% 남짓이 소작 농가였다. 따라서 토지제도의 개혁 없이는 민주주의를 기대할 수 없을 정도였기에 소작제도 개혁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렇게 법치주의의 도입, 교육제도의 개혁, 소작제도의 개혁, 노동정책의 민주화 등은 정치문화의 민주화시책으로서 이것 또한 한국의 민주화 정책의 일환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정부 수립 전까지 미국식 민주주의는 이 땅에 이식되어 간다.

 

민주사회로 정식 출항은 정부수립 이후로

이 땅에 민주’, ‘민주주의가 알려지게 된 것은 19세기 말엽부터이고, 그것도 조심스럽게 유입된 서양문물을 접할 수 있는 일부 지도층과 지식인들에게 국한된 것이었다. 일본을 통해서 새로운 정보를 접하게 된 개화세력은 이 땅에 민주주의를 보급, 확산시키지 못하고 일제에 의타해 버리고 말았다. 그 후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국권을 강탈당함에 따라 아이러니하게도 이 땅에서는 군주제를 타파하고 공화제로 전환하는 혁명적 과정은 생략된다.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은 일제로부터의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가운데 점차 확산해 갔다. 당시에 독립운동가들 대부분은 당연히 민주주의로 가야하고 군주제가 끝났으니 공화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일제 식민지통치 하에서는 이 땅에 민주주의의 씨앗이 뿌려질 여지는 전혀 없었다.

본격적으로 민주주의가 보급된 것은 해방 후 미군정의 대한(對韓) 민주화 정책을 통해서였다. 엄밀히 말해 미국의 대외전략 상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민주화가 필요했으므로 미국식 민주주의를 이식해 군정정책으로 제도화하는 작업을 추진한 것이다.


이렇게 이식된 미국식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해서 한국 민주사회는 태동하게 됐다. 쉽게 정리하면, 미국식 민주주의라는 씨앗이 이 땅에 뿌려지게 된 것일 뿐 민주주의의 착근과 발아는 차후 노력에 달리게 된 것이다. 결국 그 과제는 19488월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민주사회로의 출항이 정식으로 시작된 이후로 넘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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